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과연 내가 좋은 사제로 살아왔는지, 바람직한 사제의 모습으로 서 있는지 자신에게 질문하면 부끄러움만 앞선다. 사실, 일반적으로 이상적이고 좋은 사제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안다. 기도와 거룩한 직무에 충실한 사제, 겸손하고 온유한 사제, 신자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사제, 물질적 풍요의 삶이 아니라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사는 사제, 통치와 권력의 삶이 아니라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사는 사제, 등등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런 모습으로 살아오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제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한 절대적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일이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한국 사회에서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혜택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제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데 반해, 우리 사제들은 별다른 물질적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늘 미안함과 고마움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며, 그 미안함과 고마움의 무게만큼 더 충실하게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한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정체성과 사명에 관한 질문
우리는 검사와 의사로 사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으로 회사원으로 육체 노동자로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제로 살아간다. 사제가 누구인지, 사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늘 묻고 답을 찾아가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끝없이 물어야 한다.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사는 것과 그냥 관습과 관행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예전에는 흔히 정체성과 사명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다시 말해, 정체성 문제는 존재적 차원이어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이고, 사명은 행위적 차원이라 덜 중요하고 부차적인 문제로 여겼다. 하지만 현대의 사유 안에서 정체성과 사명은 분리되지 않는다. ‘사제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적 정체성과 ‘사제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라는 수행적 정체성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제) 사제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미사를 거행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종교적 제사장의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한다. 미사와 성사 집전은 중요한 핵심이다. 하지만 그저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미사와 성사 집전만을 한다면 우리는 종교 공무원으로 전락할 것이다. 사제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희생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다. 사제는 전례로서의 미사뿐만 아니라 자기희생이라는 삶의 미사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이다. 사제는 하느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주님의 은총이 사람들에게 가득 내리기를 간청하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사목자) 사제는 사목자다. 사목자란 사람들을 돌보고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사목자란 본당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자들을 향한 돌봄과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통치자, 관리자가 아니라 사목자다.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사목자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종말에서 왕이다. 세상에서의 그리스도 왕직 수행은 봉사와 헌신이라는 종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우리가 겸손한 종의 자세로 주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사목자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길 희망한다.
(복음 선포자, 선교사, 교육자)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사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하는 선교사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다. 복음 선포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선교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 지식을 전하는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고 체험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노년의 사제로 살아가는 이제야 나는 조금 깨닫는다. 이 막막한 이승의 삶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 주님을 아는 기쁨,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기쁨, 주님을 조금씩 닮아 가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세상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다 사라져 간다. 우리의 빛나던 청춘도 사라진다. 우리가 이루었던 모든 세속적 성취와 업적들 역시 다 사라져 간다. 세상을 살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슬퍼하거나 낙심할 필요 없다. 신앙만이 영원하다. 우리는 청춘과 성취와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신앙을 간직하고 살아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죽는 그날까지 우리는 신앙의 기쁨, 신앙의 성숙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선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신앙의 기쁨, 복음의 기쁨,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기쁨을 전하고 교육하고 양성하는 일이다. 과연 오늘날 사람들이 사제들을 통해 신앙의 기쁨, 복음의 기쁨,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기쁨을 배우고 알고 체험하고 깨닫고 살아가는지.
종말론적 순례자
사제는 끊임없이 쇄신되고 변화되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품성사는 우리가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는 시작점이다. 사제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때 거룩해진다. 사제로서, 사목자로서, 선교사로서 본연의 사명을 수행할 때 우리는 거룩해진다. 종교적 행위를 통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서 거룩해진다. 우리가 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는 주님을 닮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사제는, 전통적인 표현처럼, 주님을 닮아갈 때 거룩한 사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말과 표정과 태도와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사제의 말이, 사제의 표정이, 사제의 태도와 행동이, 사제의 온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길 기원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늘 처음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또 반복되는 생의 여정에서 근본적인 질문과 성찰을 자꾸만 놓치고 살아간다. 무심히 흐르는 시간과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를 자꾸만 무감각하게 그저 관행적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우리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다. 우리의 힘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생의 무게는 늘 버겁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과 함께, 즉 지금 여기에서 함께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성령은 내 안에 계신 주님, 세상 속에서 현존하시는 주님, 세상 모든 사람들의 영혼 안에 깃들여 계신 주님이다. 부족하고, 겁이 많고, 십자가의 현장에서 도망쳤던 그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힘만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제로 산다는 것이, 사목자로 산다는 것이, 선교사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죽는 날까지 묻고 찾고 노력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질문하고 읽고 공부하고 새롭게 상상하는 사제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정희완 신부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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