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한 해 동안 매달 세 번째 월요일에 '삶을 읽는 신학'을 연재합니다. 신앙과 신학의 시선으로 일상의 삶과 교회 현실, 사회 현상에 대해 가벼운 수필 형식으로 분석하고 성찰하고자 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정희완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산다. 이 단순한 명제를 자주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은 생각과 육체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요즘 내 화두는 노년의 삶과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노년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노년의 삶을 잘 견뎌 낼 것인지. 교회의 실재(reality)를 어떻게 분석하고 이해할 것인지,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무엇인지.

한국 사회는 내 삶의 자리다. 시민으로서 이 시대적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늠이 잘 서지 않는다. 혐오, 증오, 선동, 거짓, 폭력이 난무하는 극우 파시즘 현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부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공동선을 향한 절제와 배려보다 이기적 쾌락과 향유만을 추구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무한 질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미래 시대의 3대 ‘게임체인저’라고 불리는 인공지능(AI), 바이오 산업, 양자 컴퓨터(Quantum Computer)에 대한 설명을 접할 때마다 문과생인 나는 어지럽기만 하다.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들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미래 사회에 대해 희망보다 불안과 두려움이 더 많다.

늙어 가는 한 자연인으로서, 교회의 사제로서 산다. 정직하게 말해, 개인적 실존과 교회적 실존이 사회적 실존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다. 사유와 행동의 반경이 신앙과 교회의 삶에 더 집중되어 있다. 시민으로서 역할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시민이며 주권자다. 일본 대중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의 표현처럼 “주권자란 자기 개인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 사이에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1) 다만 신앙과 교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신앙인으로서, 교회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삶에 참여한다.

나이 든다는 것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과 나이 든다는 것에 관한 자의식이 왜 노년의 시기에 과잉되는지 잘 모르겠다. 노년에 대한 일차적 감정은 아쉬움, 서러움, 두려움이다. 정년 퇴임이라는 현실 속에서 일과 성취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느낌이다. 몸의 노화는 시선의 배제를 절감하게 한다. 죽음과 소멸의 예감은 때때로 막막하게 한다.

“늙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심신의 상태를 경험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풍부하게 하는 일”2)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젊은 노인, 즉 65세에서 84세 사이인 제3의 인생기에 속한 사람”3)이어서, 젊은 날의 욕심과 삿된 마음 없이, 오히려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가끔 내가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할 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별이 많은 밤하늘을 보면 나는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고 생은 그저 우연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종말과 구원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설명이 그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믿고 희망한다. 신앙은 확신이라기보다 믿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노년과 죽음과 죽음 이후도 다 그 나름의 의미와 어떤 해결점이 있을 것이다. 존재와 생명의 신비에 대한 희망과 신뢰다. 죽음과 소멸이라는 현실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존재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그 희망과 신뢰가 인문학적 직관과 성찰에 기초하기도 하고, 또는 ‘항상성’이라는 모든 생명의 핵심에 있는 근본적 작용 절차에 대한 과학적 설명4)에 기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그 희망과 신뢰의 원천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기쁨과 은총과 선물로서의 신앙에 기초한다.

답은 언제나 상식적이다. 노년과 죽음 역시 그 나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삶 안에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할 때 노년의 시간을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아낼 수 있으며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삶은 창조적인 삶이다.”5)

'십자가의 순례자, 여정의 마지막', 토머스 콜, 1840년대. (이미지 출처 = paintingondemand.art)
'십자가의 순례자, 여정의 마지막', 토머스 콜, 1840년대. (이미지 출처 = paintingondemand.art)

본당의 현실

교회의 위기에 관한 담론을 자주 목격한다. 하지만 담론은 그저 담론으로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탈종교화, 세속화 현상은 여전히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어둡게 한다. 밖으로부터의 도전과 위협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동력 상실이 더 큰 위험으로 다가온다. 신앙과 교회 생활의 최전선인 본당이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신앙생활의 정점인 성체성사(미사)에서 신앙인들은 과연 하느님과의 영적 일치와 친교를 깊이 체험하고 있는지. 본당의 다양한 행사와 행위들에서 신자들은 인간적 친목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친교를 체험하고 있는지. 본당의 신앙 교육과 신심 행위들이 정말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이루게 하고 있는지. 본당의 전례(성사), 교육, 친교, 봉사 행위들이 과연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정직하게 묻고, 전통의 진정한 계승과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에 구체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방향으로, 본당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본당 생활을 통해 신자들은 신앙의 참다운 의미와 기쁨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본당 생활을 통해 신자들은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공동선의 가치와 소중함을 배우고 몸에 익힐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신자들이 본당 생활을 통해 신앙의 기쁨과 공동체성을 깊이 체험하고 배우고 익혀서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신앙적 신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세상 속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교회와 본당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학교 교육과 언론이 망가지고 있는 사회 현실 속에서 종교가 공동체적 가치와 신념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독단적이고 교조적 신념을 양산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파괴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슬픈 현실이다. 오늘의 우리 교회가 자본주의의 폭주와 성찰성을 상실한 이기적 개인과 집단들의 무절제한 질주에 맞서 공동체적 가치와 신념을 선포하는 성사로 작동되고 있는지.

희망의 순례자

개인 차원이든, 교회 차원이든, 사회 차원이든 세상에 점점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만 가득한 세상에서 교회와 신앙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이 우울한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희망의 희년을 선포한 이유는 무엇일까? “산다는 게 슬픔을 갱신하는 일 같을 때”(유수연의 시, '정중하게 외롭게'6)) 희망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직하게 질문하고, 경청하고 대화하며, 배우고 공부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 안에 질문하고 경청하고 대화하고 공부하는 작은 모임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거대한 현실 속에서 사소한 일상의 응대를 말하는 것이 살짝 아쉬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미약한 일상들이 모여 거대한 세상을 구성한다. 실천은 거창한 구호와 이념 속에 있지 않다. 사랑은 언제나 일상의 태도와 자세 안에서 실현된다.

1) 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박동섭 옮김, 유유, 2024, 205.
2) 같은 책, 118.
3) 베레나 카스트, "나이 든다는 것에 관하여", 김현정 옮김, 을유문화사, 2024, 6-7.
4) 안토니오 다마지오, "느낌의 진화", 임지원, 고현석 옮김, 아르테, 2019, 39.
5) 베레나 카스트, 209.
6) 유수연,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시인선 224), 문학동네, 2024, 14.

정희완 신부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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