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슷한 시기, 비슷한 행동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오랜 정신사를 살펴보면 비슷한 데가 많다. 교류도 거의 없었을 것 같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삶의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가령 사람들은 으레 다신교적 사유를 해 왔고, 다양한 부족이나 민족만큼 여러 신을 숭배해 왔다. 태양신을 섬기거나 전쟁의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며, 대지의 신에게 풍성한 수확을 기대했다. 조상신께 빌거나 산과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특정 동물, 오래된 나무, 거대한 바위에서 신령스러운 힘을 느끼며 그에 의존하는 등 애니미즘적으로 살았다.
고대인일수록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연스러웠고, 동서양 모두 비슷했다. 지금의 눈으로 그것을 무지한 원시적 행동처럼 간주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곤란하다. 식물이나 동물 등의 생명체를 인간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다가 지구 생태계가 무너져 온 현실을 생각하면, 자연에서 신령한 기운을 보는 애니미즘적 자세는 오늘의 인간이 회복해야 할 정서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종교, 철학, 윤리적 보편성의 근간으로 여겨지고 있는 선구적 메시지들이 세계적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특정 민족이나 지역에 갇히지 않는 보편 세계에 대한 상상이 기원전 8세기경부터 3세기경 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바로 그 시대다.
2. 축의 시대, 보편적 세계에 대한 상상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오늘까지 동양 철학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는 유교와 도가 사상이 등장했다.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나왔으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유일신 개념과 그에 기반한 보편 윤리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의 평등성[인仁], 자연과의 조화[무위자연無爲自然, 중국], 세상만사의 관계성[연기緣起, 인도], 내적 주체성[마음의 법, 이스라엘], 철학적 합리주의의 토대[그리스] 등 여전히 탐구하며 따르고 있는 메시지와 세계관이 대거 등장했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붓다와 우파니샤드의 신비적 사상가들, 예레미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축의 시대’의 대표적인 현자들이다.
이 가운데 좀 더 눈여겨보려는 것은 그리스 사상이다. 그리스 사상이라지만 그 연원은 그리스 동쪽, 오늘의 튀르키예에 속하는 아나톨리아 반도(튀르키예에서 그리스 쪽으로 이어지는 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서양 최초의 철학자로 일컫는 탈레스(기원전 625-547)를 위시해,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이 태어나고 활동했다. 이 가운데 탈레스는 모든 것의 출처이자 목적인 ‘근원’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 근원이 ‘물’이라고 보았다. 서양 철학의 근본 개념인 ‘실체’를 가장 먼저 상상하며 구체화한 철학자인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변하지만 그 변화는 불변하는 법칙(로고스)에 따라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런 식의 불면, 근원에 대한 사유들이 그리스로 전해졌고, 점차 이데아 중심의 형이상학으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플라톤이 개척한 형상 너머의 세계, 즉 형이상학적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상상은 철학과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영국의 탁월한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유럽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일갈했듯이, 플라톤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근간이 되어 왔고 지금까지 수천 년 이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이 신학 사상에 끼친 영향도 더 말할 나위 없이 크다. 아나톨리아의 사상가들이 서양철학과 신학의 기초를 제공한 셈이다.
3. 동과의 만남으로서의 서
이런 식으로 서양철학은 서양의 것만이 아니다. 서양철학의 원조 격인 그리스 철학도 ‘오리엔트’, 즉 ‘동쪽 지역’의 문명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 ‘오리엔트’는 그리스어로 ‘오리엔스’(Oriens, 해뜨는 곳)에서 나온 말이다. 그 오리엔트라고 불리던 곳은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하는 아나톨리아 반도다. ‘아나톨리아’라는 말도 그리스어로 ‘떠오르다’를 의미하는 ‘아나텔로’에서 유래했다. 라틴어를 쓰던 이들은 이곳을 ‘레반트’(‘떠오르다’를 의미하는 ‘레바레’에서 나온 말)라고도 불렀다. 오리엔트, 아나톨리아, 레반트 모두 어원상으로는 ‘동쪽’을 의미한다. 유럽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아시아’도 아카드어 ‘앗수’(해가 떠오르는 곳)에서 나온 말이다. 비록 오리엔트, 아나톨리아, 레반트 등 동쪽 지역의 사상이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매개로 세계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리스 밖의 것이 없이 그리스 안의 철학이 생길 수는 없었다.
그 경로는 이랬다. 아나톨리아에서 시작된 오리엔트 문명이 오늘의 튀르키예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에게해의 크레타섬에 상륙했고,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주변 섬들 지역에서 미노아 문명이 꽃피웠다. 이 문명이 나중에는 북쪽에 있는 그리스의 미케네로 옮겨 갔다. 그리고 오리엔트 문명은 서쪽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로, 더 동쪽으로는 이른바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오리엔트’는 근대 용어인 ‘가장 먼 동쪽’[극동極東]과 ‘가장 가까운 동쪽’[근동近東] 사이의 동쪽, 즉 ‘중동’(中東, Middle East) 문명을 가리키는 말처럼 점차 확장되어 쓰였다.
이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기독교가 발생했고, 기독교가 다시 그리스와 로마에 전해지면서 서양 역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다시 이슬람 문명의 뿌리가 되었고, 이슬람 문명은 이른바 중세기까지 화려하게 꽃피며 서양에 다시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서양에서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부르곤 하지만, 그것은 유럽 중심으로 판단한 언어일 뿐, 동쪽의 이슬람 문명까지 포함하면 절대로 ‘암흑’이 아니었다. 이슬람을 제외하니 암흑처럼 보였을 뿐, 사실상 ‘동쪽 지역’에서는 이슬람 문명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중세는 찬란한 이슬람의 시대이기도 했다. 오리엔트 문명의 흔적이 세계 곳곳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구의 문명 전반을 보면, 동과 서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이들은 서로 얽혀 있다. 서로가 서로의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 연재에서는 주로 서양 문명과 사상의 기원을 다루겠지만, 서쪽의 문명도 동쪽의 문명과 얽히며 그 근간이 형성된 것이다.
이찬수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신학, 불교학, 철학을 중심으로 이십여 년 종교학을, 십수 년 평화학을 강의하고 연구했으며, 아시아종교평화학회를 창립해 부회장으로 봉사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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