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기쁨과 희망> 33호(2024 여름,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암흑 속의 횃불 - 1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50주년' 특집에 실린 글입니다.
미국 애리조나주 노갈레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가르는 9미터의 철조망 장벽이 마을의 허리를 끊는 곳에서 복잡한 심경으로 글을 쓴다. 하루 평균 2만 명의 인파가 가난과 폭력을 피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국경을 넘는다. 이들 중 많은 이는 체류자격을 얻지 못한 채 사막을 통해 국경을 넘다가 길에서 죽기도 한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정치인들과 언론은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숫자로 존재하는 그들은 이주민 혹은 빈민이라는 집합명사로 불리며, 때로는 ‘범죄자’로 몰린다. 제도권 정치의 주도권을 누가 쥐든, 이들 삶의 조건은 밑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 사회의 희망처럼 떠올랐던 오바마 대통령 시기에 오히려 가장 많은 이주민이 체포되고 추방되었다.
‘사제단과 한국 사회’를 주제로 글을 쓰면서 뜬금없이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어디에나 있는 밑바닥 삶이 보여 주는 어떤 기시감 때문이다. 또한 20년 넘게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경계인으로서 나의 한계와, 그 한계가 만들어 낸 시각의 특수성을 미리 밝히고자 함이다. 어둠을 훤히 밝히는 횃불은 그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후미진 자리를 더 짙은 어둠에 놓아 둔다. 불의를 성토하는 광장의 함성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들의 신음을 묻어 버린다. 나와 같은 경계인은 이렇듯 그늘진 구석의 삶과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쪽과 저쪽으로 편을 가르기 힘든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삶의 조건 때문이다.
나는 정의구현사제단에 빚진 것이 많다. 종교에 실망했던 십대 시절, 명동 성당에서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는 사제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길을 보았고 결국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년에 한 번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사제단이 있는 곳을 찾았다. 사제들이 있는 곳에 고통받는 민중이 있었다. 강정, 밀양,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위한 길거리 미사,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단식기도회, 그리고 또 많은 고난의 현장에서 사제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며 가슴이 뜨거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제단이 서 있는 광장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의 성찰이 비판으로 끝나기보다 함께 열어 갈 대화로, 갈라서기보다 더 굳건한 동행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광장의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어쩌면 그 불편함은 사제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광장의 정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품어 안고 촛불혁명을 이루어 냈던 광장은 이제 소위 ‘보수’와 ‘진보’가 진영을 나눠 서로를 향해 욕설과 비방을 쏟아 내는 기괴한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한쪽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이재명 구속’과 ‘빨갱이 척결’을 외치고, 다른 쪽에서는 파란 풍선과 특정 정당 대표의 사진을 흔들며 ‘윤석열 퇴진’과 ‘김건희 특검’을 외친다. 양 진영은 각자 자신의 옳음과 정의로움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척결, 타도, 필사, 저지. 적대와 희화로 가득 찬 구호를 내뱉는 양쪽의 성난 얼굴은 신기하게도 닮아 있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광장에 서 있는 사제들에게서 이 얼굴을 얼핏 발견한 순간이었다. 사제들의 광장이 정치적 결투장으로 변해 버린 광장과 구분이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나는 안타깝다.
광장의 정치로 드러나는 정치적 양극화는 단순 명료함이 특징이며, 타자화와 혐오를 연료로 사용한다.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치부하며 밀쳐내고 증오하는 것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정치 양극화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아마도 일부 극우 집단의 패악이겠지만, 굳이 그들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를 양쪽 벼랑 끝까지 갈라버린 혐의에서 ‘진보’ 진영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낙관적 진보주의와 선악 이분법적 사고가 자리한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을 세대 간 갈등으로 귀결시키는 세대론을 나는 경계하지만, 흔히 ‘586세대’ 정치 엘리트들을 비판할 때 언급되는 이 두 가지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군사독재라는 분명한 ‘적’과 싸워 이긴 80년대의 귀중한 경험은 ‘우리가 나서면 할 수 있다’라는 선민(選民) 의식에 기반한 낙관적 진보주의를 낳았다. 이 경험 안에는 ‘적’과 ‘우리’를 나누는 이분법적 논리, 나아가 상대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는 선악의 잣대까지 장착되어 있다. 낙관적 진보주의가 선악의 이분법과 결합할 때 일어나는 불안은 강력하고 성급하다. 이 불안은 악의 무리를 척결할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갈망을 낳으며, 모든 문제의 해법을 어느 정당을 지지하고 어느 정치인을 당선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수렴한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향한 지지가 자신의 정체성과 도덕률이 되어 버리는 순간, 다름과 비판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비판하는 이들을 순식간에 적으로 규정한다.
혐오와 배타가 가득 찬 광장의 정치에서 실종되는 것이 있다. ‘보수’와 ‘진보’ 양편 모두를 힘들게 하는 삶의 조건들, 이를테면 노동 불안정, 각종 차별, 주거, 임금, 교육, 기후 위기 등 보편 주제에 대한 토론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식별이다. 선거에서 누가 승리를 쟁취하건 바닥을 벗어나기 힘든 빈민과 노동자, 이주민,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 참사 피해자와 그 가족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청년들은 여야 모두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들의 웅얼거림은 광장의 고함 소리에 묻혀 버린다.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모든 것은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당선시키고야 말겠다는 대명제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내 진영의 견고함을 다지기 위한 각종 음모론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광장의 정치는 일상 속에 있는 다양한 억압들을 냉철하게 바라볼 판단력을 흐리며, 때로는 복잡하고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어야 할 질문들을 틀어막는다. 또한 이 억압들과 촘촘하게 얽혀 나도 모르게 가져 버린 특권이나 혐오, 우리 안의 위계와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적’을 타도하는 구호 속에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 성찰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고통받는 이웃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의 얼굴도, 생각과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복음의 메시지도, 친교와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도 발견하기 어렵다. 나 자신이 변화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신앙의 여정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방한 당시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며 ‘고통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나는 교종의 언급을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당파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당파성이다. 가난한 이들 중에는 나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도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고립될 것이 두려워 보수의 동원력이 되어 버린 노인들도 있고, 처절한 경쟁의 세상, 밀려나고 절망하며 허울에 불과한 ‘공정’의 가치에 기대를 거는 청년들도 있다.
어쩌면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도 그랬을 것이다. 같은 스승의 곁에 있었지만 열두 제자는 생각도 정치적 비전도 다양했다. 하물며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던 천태만상 ‘무리’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세상을 꿈꾸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의 얼굴은 오늘날 광화문 광장에 모인 갈라지고 쪼개진 얼굴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저마다 삶에 지쳐 뒤틀린 얼굴로 욕설을 내뱉으며, 내 밥그릇부터 채워 달라고, 내 병부터 고쳐 내라고, 내가 제일 억울하고 불행하다고 고래고래 외쳤을 것이다. 그 악다구니 속에서 예수가 바라본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품은 ‘참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의 억울함을 들었으며, 그들을 아픔을 어루만지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했다. 그는 끝내 자신의 목숨마저 내주었다.
이런 예수를 닮는 것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당파성이 아닐까? 진영을 뛰어넘어 사회의 구석에 몰린 이들, 상처 입고 서러운 ‘인간’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고 확신하여 오히려 그들을 음성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닐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가 그랬듯 먼저 다가가 몸을 낮추고 심장을 열고 그들의 음성을 들으며, 그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 아닐까?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쉽지 않은 길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가능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이미, 아직’의 긴장으로,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그 간극을 채울 수 있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제단의 이름이기도 한 ‘정의구현’이 인간이 구현하는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라면, 이 또한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국회의 의석수 확보나 불의한 지도자 탄핵, 새로운 지도자 선출로 입증할 수 없다. 하느님의 정의가 일어나는 곳은 현실 정치에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며 힘으로 꺾을 수도 없는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 역사의 정의에 고랑을 내지만, 동일시될 수 없으며 얽매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정의는 오히려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이루어 낸 성취를 급진적으로 상대화하고, 승리의 순간에 재생산되는 권력을 막아서며, 배불리 먹는 아홉이 아니라 굶주린 하나를 위해 다시 골짜기를 헤매는 힘이다.
세 가지 바람: 깨진 자리를 지키는 이들, 성체를 나누는 이들, 사랑을 증거하는 이들
사제단이 걸어온 여정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여정이다. 그러기에 나는 사제단의 당파성이 가난한 이들의 곁을 지키는 당파성이며, 사제단이 목말라 하는 정의가 하느님의 정의임을 믿는다. 그러기에 사제단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품고 세 가지 바람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의 바람은 사제단을 향한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다. 나 자신부터 마음에 새기는 삶의 지향이다.
첫째, 나는 오늘날 한국 사회, 사제단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아야 할 곳이 인간의 정치가 이루어 내는 승리의 자리가 아니라 환상과 기대가 모두 깨어진 절망의 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그의 저서 "사회학적 파상력"에서 ‘파상’(破像)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파상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을 일컫는다. 파상력은 이러한 와해 체험을 통해 현존하는 존재들의 가상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이다. 부재하는 존재를 가상으로 현존하게 하는 힘이 상상력이라면, 파상력은 꿈에 취해 있기를 거부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파국임을 직시하며 그것을 겪어 내는 힘이다. 파상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시선은 권력자들이 만들어 내는 광장의 신기루를 좇지 않고 소외된 이들이 살고 있는 후미진 골목으로 향한다. 가난과 폭력, 차별과 혐오, 전쟁과 기후재난으로 스러지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보이고 들릴 수 있도록 광장의 횃불을 골목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그 취약한 삶의 파편들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던 순간은 파상의 순간이다. 그가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 완전무결한 권력을 거머쥐길 기대했던 제자들의 꿈이 산산이 깨어진 자리, 그의 시신조차 사라진 빈 무덤가에서 숨죽여 울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찾아왔다. 허름한 정원지기의 모습으로, 옆구리 손발에 상처를 지닌 채 그는 인간의 지평을 뛰어넘는 희망을 열었다. 파상을 체험한 이들이 찾는 희망은 부활의 희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희망은 인간의 자산과 정치, 사회적 자원과 상상력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예수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고 선포하였을 것이다.
둘째, 차별과 혐오의 세상 속, 나는 사제단이 정치적 구호에 편승하기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체성사는 무엇보다 일치의 신비를 드러낸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사목 표어로 삼았다. 신분의 고하, 세대와 좌우를 아우르며 모든 이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삶을 살고자 애쓰셨던 그분의 시간을 기억한다. 추기경의 행보와 사목의 중심에는 성체성사가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나 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성체를 모시는 것입니다.... 인간 상호 간의 친교, 모든 이의 일치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이들이 신분이나 사회계급 및 인종의 차를 넘어서, 또 서로의 마음 상한 것을 다 풀고 용서해 줌으로써 참으로 주님 안에 하나 되는 것이 참된 의미의 영성체(Communion)입니다”라 했다.("김수환 추기경 전집 14", 405-406쪽)
성체성사는 일치와 동시에 나눔의 성사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부서지고 나누어져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된다. 이 그리스도의 몸은 폐쇄적이고 생기 없는 죽은 몸이 아닌, 모든 살아 있는 것과 결합하여 생명을 지속시키는 유기체다. 즉,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한다고 믿는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이 우리의 몸과 결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실재하는 생명의 신비가 된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신진대사를 하며 내부 움직임과 외부 자극에 늘 열려 있는 몸이다. 몸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이질성, ‘다름’을 거부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열려 있어야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는 교회는 이렇게 열려 있어야 한다. 몸의 지체이자 세포인 신자들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들으며, 그들의 팔과 다리로 세상과 연결되고, 그들의 입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교회는 숨 쉬고 성장할 수 있다. 어떠한 사회 이념이나 교리 기준을 전제로 따로따로 뭉치는 곳이 교회가 될 수는 없다. 구성원 각자의 고유한 삶과 살아가는 방식이 연결되어 서로 의지하며 공동의 삶을 추구하는 곳이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가 지향하는 교회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율적, 자발적, 일상적 접촉이 자연스러운 소통의 장소가 교회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인종과 성 정체성, 경제 조건과 학력, 정치 성향, 교회 내 직책과 역할이 다르다는 까닭으로 위계와 차별을 용인하고 묵과하는 곳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존중과 배려를 받을 수 있는 곳, 서로의 다른 경험 때문에 더욱 풍성한 잔치가 되는 곳이 교회다.
이렇게 살아 있는 교회, 신명 나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사제단이 먼저 힘써 줄 수는 없을까. 교회 밖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상처가 곪아가는 부분이 있다면 그 또한 솔직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을까. ‘옮음’을 빌미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무대 위보다 신자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무대 뒤편에서 사제들을 더 많이 볼 수는 없을까. 비움과 복음적 포기를 통해 비로소 채워지는 진리를 사제단부터 실현해 줄 수는 없을까.
셋째, 나는 고통의 현장에서 사제단이 서 있는 자리는 무엇보다 사랑을 드러내는 자리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랑은 예수가 몸소 삶과 죽음을 통해 가르치신 사랑이다. ‘정치적 사랑’을 강조한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험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모든 형제들', 92항) 교종이 강조하는 정치적 사랑은 “겉보기에는 깊은 관계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적 친분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내 편만을 챙기고 결속시켜 힘을 키우는 것은 정치적 사랑이 아니라 '마피아 정치'이며, 이는 “그릇된 공동체 정신으로, 풀려나기 어려운 의존과 종속의 유대관계”를 만든다.('모든 형제들', 28항)
낙관적 진보주의와 선악의 이분법이 자리 잡고 있는 광장의 정치판에서는 교종이 강조한 '정치적 사랑'을 찾기 힘들다. 사랑은 추상적인 구호나 공약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을 향한다.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존엄을 깨닫고, 그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며, 그들의 존엄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그들을 사랑함으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정치적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내게 익숙한 질서와 이념, 내 능력과 의지를 지탱하던 세계를 위반하고 내게 낯선 세상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나는 사제단이 이런 사랑으로 광장을 변화시키도록 힘써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랑으로 광장과 후미진 골목을 잇고 하느님의 정의가 넘쳐날 물길을 내어 주면 좋겠다. 그 사랑에 나 역시 동참하여 함께 변화하고 함께 성장하고 싶다.
조민아
신학자.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