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푸징(王府井)의 성당, 동당(東堂)은 1655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기원은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쓰촨(四川)의 두 선교사, 불리오(Ludovico Buglio, 利類斯, 1606-82)와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ães, 安文思, 1609-77)는 1648년에 북경에 이른다. 후거(豪格, 1609-48)의 포로로, 예부(禮部)의 손님으로, 청(淸)의 반역자로, 두 사람의 신분은 위태로운 곡선을 그렸다. 북경에 오고서 몇 달 동안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2년의 감금생활이 이어졌다.
노예의 신분
형벌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두 신부는 만주족 장수 퉁투라이(佟圖賴, 1606-58)의 가문에 노예로 보내진다. 퉁투라이는 훗날 강희제(康熙帝)의 외조부가 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강희제의 외삼촌인 퉁궈강(佟國綱)의 집에서 일했다. 노예의 신분은 거추장스럽고 무거웠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말 ‘노예처럼’ 산 건 아니다. 퉁 씨 집안의 사람들은 선교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담 샬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천주교에도 관심이 컸다. 두 신부의 권유로 집 안에 작은 경당을 들일 정도였다.
1651년, 두 신부는 마침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다. 그들의 요청을 청 조정이 받아들인 게다. 아담 샬의 중재가 큰 역할을 했다. 1651년은 순치제(順治帝)가 도르곤(多爾袞, 1612-50)의 섭정을 끝내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해다. 순치제가 샬을 무척 총애했으니 샬의 영향력도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두 신부는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북경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또한 남당(南堂)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남당은 샬의 거처였다. 샬과 두 신부는 감정의 골이 깊었다. 샬은 두 신부를 남당에 들이려 하지 않았다. 두 신부는 머물 곳이 없었다. 퉁 씨 집안에 4년을 더 의탁했던 이유다.
활동의 시작, 새로운 거처
퉁 씨 가문에 있는 동안, 두 신부는 선교에 힘을 쏟았다. 신자도 많이 늘었다. 두 신부는 성당을 마련할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돈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모금을 시작한다. 이때 그들에게 기부한 이가 정지룡(鄭芝龍, 1604-61)이다. 그는 푸젠(福建) 일대의 해적을 몰아내고 강력한 군벌이 된 이다. 명(明)이 망하자 그는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 1602-46)을 황제로 옹립한다. 남명(南明)의 융무제(隆武帝)다. 하지만 청군이 푸젠에 들이닥치자 정지룡은 곧장 청에 귀순했다. 그가 북경에 오게 된 연유다. 그의 아들이 바로 정성공(鄭成功, 1624-62)이었다.
정성공은 아비와 달리 청에 끝까지 저항했다. 대세가 기울자 그는 타이완(臺灣)을 공격해 수복한다. 장기전을 위한 포석이었다. 당시 타이완은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었다. 40년에 가까운 식민통치였다. 중국이 지금까지도 정성공을 기리는 이유다. 아무튼, 그의 아비 정지룡은 북경에서 두 신부에게 각별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거처를 구해주고 생활비도 지원했다. 두 신부는 그 거처를 조그만 성당으로 꾸몄다. 동당의 시초다. 1651년의 일이었다.
순치제와 만남, 그리고 조유스다
두 신부의 선교는 열정적이었다. 두 사람의 활동이 점차 북경 전역에 알려졌다. 그리고 순치제에게도 전해졌다. 순치12년 2월 27일(양력 1655년 4월 3일), 황제는 두 신부를 궁으로 불렀다. 소식을 접한 두 사람은 서둘러 진상품을 준비했다. 자명종, 모래시계, 망원경, 조총, 서양화집과 천주교 성상화집. 유럽에서 가져온 여섯 종의 물품이었다. 정황상 두 사람에게 이런 물품이 있었을 리 없다. 틀림없이 다른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원이 있었을 게다.
순치제는 두 신부의 노고를 위로하며 상을 내렸다. 집 한 채, 그리고 돈과 쌀이었다. 흔히들 황제가 ‘교당(敎堂)’을 하사했다고 알고 있다. 불리오의 기록도 그러하다. 하지만 두 신부가 받은 것은 ‘성당’이 아니라 집 한 채였다. 그 주택에 두 신부가 성당을 세운 것이다. 퉁 씨 가문과 조유스다(曹儒斯大, Justa Chao)가 새로운 성당 건립을 위해 기부했다. 조유스다는 숙친왕(肅親王) 후거의 측실 부인이다. ‘유스다’는 그녀의 세례명이다.
두 신부는 후거의 포로로 북경에 왔다. 후거는 자신의 저택에 두 신부를 머물게 했다. 이때 두 사람은 후거의 가솔들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중 여러 명이 세례를 받았다. 후거의 아내도 그중 하나였다. 후거가 도르곤의 음모로 죽자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다. 이후 조유스다는 북경 선교에서 재정적으로 크게 기여했다. 상해의 서칸디다(徐甘第大, Candida Xu, 1607-80)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게다. 서칸디다는 서광계(徐光啟, 1562-1633)의 손녀로 상해 선교를 크게 도운 사람이다.
동당이 세워지다
동당이 완성된 시기는 정확치 않다.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나 강희(康熙) 원년, 즉 1662년이 대체적인 견해다. 새로운 성당은 이오니아식 기둥을 가진 유럽풍의 작은 건물이었다. 외관은 수수했다. 박공지붕이었고 정면 꼭대기에 십자가를 올렸다. 십자가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박공지붕 사이의 삼각형 벽면이 보인다. 거기엔 무릎 꿇은 천사 조각상 두 개가 양각되어 있었다. 그 아래엔 금박의 글자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순금 편액이었다. 마갈량이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중국 선교지에 처음으로 세워진 공개적인 천주교 기념비입니다.” 샬의 성당을 의식한 말일 수도 있겠다.
두 신부는 이 성당을 구세주당(救世主堂) 혹은 성약슬당(聖若瑟堂)으로 명했다. 하지만 ‘동당(東堂)’이라는 명칭이 더 유명했다. 성당이 자리한 곳이 자금성의 동쪽 문 근처였기 때문이다. 동안문(東安門) 밖 건어물 골목(干魚胡衕)이다. 오늘날 왕푸징 성당이 있는 바로 그 자리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북경에는 아담 샬이 거주하던 성당이 있었다. 흔히 ‘남당(南堂)’으로 부르는 선무문(宣武門) 성당이다. 선무문은 자금성의 서남쪽이다. 두 개의 성당이 자금성의 동과 서에 있게 된 게다. 그래서 샬의 성당을 ‘서당(西堂)’, 두 신부의 성당을 ‘동당(東堂)’으로 불렀다. 나중에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자금성 서쪽 옆 잠지구(蠶池口)에 새로운 성당을 지었다. ‘북당(北堂)’이다. 그때부터 서당, 즉 선무문의 성당을 ‘남당(南堂)’으로 고쳐 불렀다.
동당, 북경 선교의 새로운 시작
동당이 건립되자 1651년에 처음 세운 성당은 두 신부의 거처로 사용했다. 이후, 동당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중심 거점이 된다. 1653년, 구베아(António de Gouvea, 何大化, 1592-1677)의 편지에는 재밌는 표현이 나온다. “마갈량이스가 머무는 거처에는 모두 천주교 신자들이 왕래합니다. 그런데 아담 샬의 거처에 오가는 이들은 모두가 관리였습니다.” 이 말은 두 신부와 샬의 선교가 어떻게 달랐는지 선명히 드러낸다. 불리오가 중국어로 번역한 책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사나 신앙생활에 실제로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 점이 말해 주는 바는 분명하다. 두 신부의 주요 무대는 궁정이 아니었다. 궁정에서는 샬과 페르비스트만이 빛났다. 하지만 궁정 밖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었다. 북경 선교가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글에 계속...)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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