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易姓), 혁명의 시대

반란군이 세운 나라, 대서(大西)는 2년 넘게 지속된다. 그 끝은 장헌충(張獻忠, 1606-47)의 죽음이었다. 겨울이 세 번 지나는 동안, 북쪽은 더욱 소란했다. 이자성(李自成, 1606-45)의 군대가 북쪽 일대를 휩쓴다. 또 다른 반란군 세력이었다. 1644년 3월, 이자성은 북경을 친다. 서안(西安)에서 북경까지 그들은 단숨에 치고 들어갔다.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 숭정(崇禎)은 자결한다. 명(明)이 망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만주족의 청(淸)이 북경을 접수한다.

청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인다. 반란군 세력이 차례로 스러져 갔다. 이자성을 쳐낸 청군은 쓰촨으로 진군한다. 1647년 1월, 청군의 기습공격에 장헌충이 숨진다. 수장이 죽자 부하들은 흩어졌다. 불리오(Ludovico Buglio, 利類斯, 1606-82)와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ães, 安文思, 1609-77)는 청군에게 붙잡힌다. 청군의 사령관은 숙친왕(肅親王) 후거(豪格, 1609-48)였다. 그는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과 친분이 있었다. 두 유럽인이 샬의 동료임을 확인하자 그는 신부들을 예우했다. 두 신부는 포로였지만 청의 군영에서 자유롭게 생활한다.

아담 샬, 청의 흠천감정이 되다

아담 샬은 북경에 있었다. 거듭된 전란으로 북경은 잿더미였다. 그 폐허 위에서 만주족은 새로운 시대로 도약한다. 대청제국(大淸帝國). 1643년, 2대 황제 홍타이지가 사망하자 순치(順治)가 등극한다. 그해 다섯 살. 홍타이지의 아홉째 아들이었다. 황제가 어렸으니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1612-50)이 섭정한다. 순치의 숙부로 북경 점령의 선봉장이었다. 순치는 한족을 만주족 거주지 밖으로 몰아낸다. 그의 첫 번째 명령이었다.

이 조치로 샬은 거처에서 쫓겨난다. 샬은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주문을 작성해 청 조정으로 향했다. 청 조정은 그를 예우했다. 명 조정의 흠천감(欽天監) 수장. 한때 샬의 직위였다. 흠천감은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기구다. 청 조정은 샬이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허락한다. 샬이 조선의 세자 소현(昭顯)을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1645년, 어린 황제는 조서를 내린다. 샬을 조정에 기용하는 내용이었다. 샬이 받은 관직은 흠천감정(欽天監正). 흠천감의 책임자였다. 동시에 태당시소경(太常寺少卿)이라는 직책도 받는다. 정사품(正四品)의 문인 관리. 궁궐 사무를 맡아보는 자리였다.

상황을 오판하다

1647년, 샬은 포로가 된 두 신부의 소식을 듣는다. 그는 즉시 상주문을 준비했다. 그들의 석방을 청원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푸르타도(Francisco Furtado, 傅汎際, 1587-1653)가 만류한다. 그는 북방 선교지의 책임자였다. 요동치는 정세였다. 섣불리 나서는 건 위험할 수 있었다. 마걀량이스와 불리오 역시 샬의 개입을 원치 않았다. 후거는 자신들을 예우하고 도와 준 사람이었다. 그에게 압력을 넣는 건 무례라고 생각했다. 북경에 도착하면 후거가 손을 쓸 것이고, 그들은 곧 석방되리라. 명백한 오판이었다.

선교사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후거와 도르곤의 관계다. 후거는 홍타이지의 장자다.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이었다. 나이는 후거가 세 살 위다. 서열상 홍타이지의 후계는 후거였다. 도르곤 역시 후계 구도의 최상위에 있었다. 허나 후계를 정하지 않은 채, 홍타이지가 급사한다. 후거는 용맹했고, 도르곤은 야망이 컸다. 후거의 전공은 혁혁했다. 도르곤은 위협을 느낀다. 그에게 후거는 큰 걸림돌이었다.

북경고관상대(北京古觀象臺). 청 조정이 아담 샬의 건의에 따라 세운 천문관측소다. 자금성의 동남쪽으로 지하철 1, 2호선이 만나는 건국문(建國門)역에 있다. C번 출구로 나오면 13미터 높이의 망루와 마주하게 된다. 망루 꼭대기에는 둥글거나 세모난 관측기구들이 도열하듯 하늘을 향해 있다. 흠천감은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아담 샬은 흠천감의 책임자였다. 거기서 샬은 서양의 시간측정 방법을 사용한 역법을 만들었다. ©오현석
북경고관상대(北京古觀象臺). 청 조정이 아담 샬의 건의에 따라 세운 천문관측소다. 자금성의 동남쪽으로 지하철 1, 2호선이 만나는 건국문(建國門)역에 있다. C번 출구로 나오면 13미터 높이의 망루와 마주하게 된다. 망루 꼭대기에는 둥글거나 세모난 관측기구들이 도열하듯 하늘을 향해 있다. 흠천감은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아담 샬은 흠천감의 책임자였다. 거기서 샬은 서양의 시간측정 방법을 사용한 역법을 만들었다. ©오현석

반역자라는 굴레

1648년 2월, 후거가 북경에 입성한다. 불리오와 마갈량이스도 북경에 발을 들인다. 후거의 군대를 따라 쓰촨에서 북경까지 꼬박 1년이었다. 후거는 개선장군이었으나 곧 옥에 갇힌다. 도르곤의 획책이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후거는 자결한다. 한편, 두 신부는 처음에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예부(禮部)의 관사에서 머물렀다. 외국의 귀빈을 접대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석 달하고도 7일을 머문다. 그리고 광록시(光祿寺)로 옮겨진다. 황실의 제사 물품과 연회를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거기서 두 신부는 돌연 감금된다.

예부 관아에서 그들은 일종의 ‘심사’ 단계였다. 신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던 게다. 하지만 후거가 죽은 후, 상황은 돌변한다. 반역자. 그들의 신분이 확정된다. ‘천학국사(天學國師)’. 거창한 이름의 관직을 장헌충에게서 받지 않았던가. 그들은 반역자의 나라 대서(大西)에 충성한 자였다. 샬은 그들을 구하려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청 조정의 경고를 받는다. 강하고 날카로운 경고였다. 반역자를 만나는 건 샬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오해를 사면 예수회의 중국 선교 전체가 거꾸러질 수도 있었다.

갈등의 시작

샬은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푸르타도에게 상황을 보고한다. 그리고 두 신부를 비판한다. 폭군의 손에 죽을지언정 관직은 결단코 거절했어야 했다. ‘그냥 죽지. 왜 왔니?’ 요샛말로 하면 더욱 섬뜩하다. 샬의 비판은 두 신부에게 비수였다. 마갈량이스는 샬의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샬 역시 만주족 조정의 관직을 받은 자였다. 그나 샬이나 도긴개긴이었다. 장헌충 치하의 시절은 그에게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샬의 비난은 뼈에 사무쳤다.

불리오와 마갈량이스는 광록시에 2년 동안 감금된다. 그 후에는 만주족 장수의 노예로 보내졌다. 전쟁포로는 공신에게 내리는 포상이었다. 1651년(순치 8년), 그들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다. 샬이 순치제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주족 장수의 집에 4년을 더 머문다. 감금과 노예의 생활은 두 신부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다. 그들은 이 고통을 모두 샬의 탓으로 돌렸다. 샬은 차갑고 오만했다. 그들의 고통을 샬은 외면했다. 두 신부가 보는 샬의 모습이었다.

반은 맞는 말이다. 실제로 샬은 두 사람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청 조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방식은 매우 거칠었다. 두 신부는 샬의 정치적 고려를 몰랐고, 샬은 동료의 억울함을 헤아리지 못했다. 원한의 단초는 점점 자랐다. 마갈량이스의 원한은 샬을 고소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자유의 몸이 된 뒤에도 두 신부는 남당(南堂)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남당은 샬의 거처였다. 그들은 새로운 집이 필요했다. 1655년, 동당(東堂)의 시작이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