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개혁, 폭력에서 복음으로 전환
(기사 출처 = NCR)
(오스틴 아이버레이)
(원문 편집자 주: 이 글은 오스틴 아이버레이가 5월 25일 전 세계 남자 수도회의 협의체인 세계남자수도회 장상연합회(USG)에서 한 강연의 축약본이다. <NCR>은 아이버레이의 허락을 받아 이 글을 낸다.)
지난 2003년 11월, 당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교황청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멕시코의 한 수도자가 칠레의 한 잡지에 쓴 글에 전 세계 가톨릭계가 놀라움에 빠졌다.
당시 나는 런던에서 발행되는 가톨릭 주간지 <태블릿>의 부편집장이었는데, 그 글을 번역하고 편집을 맡았다. “교회 안의 폭력”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당시 감히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가 말할 것인지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돌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필자인 카미요 마치세 신부는 가르멜 남자수도회 소속으로, 로마에 있는 세계남자수도회 장상연합회 회장을 맡은 바 있으며, 가르멜회 총장으로서 2번째 임기를 마치고 막 퇴임한 상태였다.
폭력은 물리적, 윤리적, 심리적 강압을 동반하여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는 행위다. 예수는 우리를 노예 상태와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왔으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위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 안의 권위는 봉사다. 즉 직무(ministerium)이지 권력(potestas)이 아니다. 폭력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마치세 수사가 가르멜회의 장상으로서 6년 임기를 두 번 치르고, 1990년대 후반에 세계남자수도회 장상연합회 회장을 지내면서 우선 겪은 것은 “윤리적, 심리적 성격의 폭력”이었다. 그는 “나는 이러한 폭력을 아주 자세히 알고 있는데, 결국은 많은 교황청 고위관리들이 행사하는 폭력이다"라고 쓰고, 이어서 “폭력”이 행사되는 방식, 중앙집권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교조주의 안에서 이러한 폭력이 어떻게 저질러지는지를 묘사했다.
소다노 추기경은 올해 5월 27일 로마에서 94살로 사망했다. 6월 5일 교황청 개혁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새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가 실행되기 겨우 며칠 전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조치로 지난 9년의 재임기간 진행시켜 온 교황청 개혁을 공고히 하고 심화했다. 이 개혁의 목표는 다름 아닌, 로마에서 그리고 로마로부터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을 전환(conversion)한 것이며, 또한 그 전환된 권력을 전 세계 가톨릭교회 안에서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이 전환을 이해하려면, 마치세의 글을 옆에 두고 참조하면서 이번 교황령을 봐야 한다.
새 교황령은 이 글에 대한 응답이다. 10년 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출한) 콘클라베 직전의 추기경 예비모임에서 발언자들이 잇따라 일어나 개탄했던 것은 바로 마치세가 2003년에 용기를 내어 크게 외쳤던 것 그대로다.
교황령에서도 서술하듯, 이 개혁은 2013년 3월 “콘클라베 전 전체 모임에 참석한 추기경 대다수가 강력히 바랐던” 것이다. 그런 이들 가운데 당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교황이 되어) 그 개혁 작업을 맡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어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9년 뒤인 지난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 미사가 치러진 기념일에, 교황청 개혁을 마무리짓는 이 교황령이 발표됐다. 그는 즉위 미사 강론에서 창조와 피조물을 둘 다 보호함으로써 봉사하는 존재로서의 올바른 권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은 부드럽고, 성스러운 힘인 바, 신의 힘과 협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가 의지해야 하는 힘이다.
이번 교황령에서 그러한 권력으로의 전환은 제목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난다. 지금까지의 교황청 조직을 규정한 지난 1988년의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교황령 ‘착한 목자’(Pastor Bonus)의 제목은 “로마 교황청의 교황령”이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다음과 같이 의미 깊게 덧붙인다. '그리고 세상 속의 교회에 대한 그 봉사'.
2003년으로 돌아가서, 마치세는 교황청 권력이 보호나 교정이 필요한 어린이로 여겨지는 신자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 기구에 어떻게 집중되어 있는지 그려냈다.
중앙집권주의의 핵심은 교황청이 교황과 (교황청 너머의) 더 넓은 교회 사이에 끼어드는 방식에 있다. 교황청은 교황직을 대리하는 권세를 이용해 주교들을 을러댔다. 이 주교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교단체성 교의에 따르면 교황과 더불어 교회를 통치하는 존재다. 그러나 사도좌(교황청) 정기방문 때면, 주교들이 자주 말하듯, 교황청은 이들을 마치 어린 복사처럼 취급했다. 세계남자수도회 장상연합회와 세계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UISG)는 전 세계 100만이 넘는 수도자들을 대표하는데도, 1995년부터 요한바오로 2세 교황과의 만남은 이들을 미심쩍어 하는 교황청 관리들에 의해 차단됐으며, 2005년 교황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관해,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교황청이 “교황과 주교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에게 온전히 봉사한다”고 명백히 밝힌다. 제38-43항의 6개 항이 지역 주교들의 사도좌 정기방문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요성을 부각하고, 교황청의 역할은 이 방문을 촉진하고, 고무시키며 대화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햔다.
사실 이는 지난 9년간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위 내내 이뤄진 것이다. 과거의 방식을 기억하는 주교들은 이제 교황청 각 부서를 방문할 때 이들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것을 보고 놀란다. 교황과 2시간에 걸쳐 만나는 중에 무엇이든 모든 것이 의제에 오를 수 있는 자유로운 흐름에도 놀란다.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나는 것은 이제 아주 당연해서 새삼 뉴스가 되지도 않는다.
마치세는 신자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문서들이 교황청에서 쏟아져 나오지만 그런 문서의 초안 과정에서 신자들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는다고 고발했다. 1999년 관상생활과 봉쇄생활을 다룬 문서 ‘수도 생활에 관한 교회 문헌’(Verbi Sponsa)이 준비될 동안, 전 세계에 있는 가르멜회 수도원 775곳 어느 곳과도 협의하지 않았다.
소다노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청은 “권위주의적 폭력의 습관적 형태들”을 구사했다. “이단적”인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로마에 익명으로 고발했고, 스스로를 신성한 권력이라는 갑옷으로 둘러싼 교황청 관리들에 의해 이단으로 고발된 신학자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폭력의 “습관적 형태들” 중 하나는 “다원적 세계에서 단일한 종교적, 문화적, 신학적 관점을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교조주의(dogmatism)였다. 이 교조주의자들은 필수적인 교의와 상대적인 신학적 표현들을 혼동했다. 또 마치세는 대화를 억압함으로써 교회의 긴장과 갈등을 제거하려는 시도, 일치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엄격한 단일성을 강요하는 공포 조성 등을 지적했다.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만들어낸 교황청은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아주 힘들다. 교황청이 내는 문서들은 우선 그 숫자가 크게 줄었고, 고통스럽고 긴 협의를 거친 결과물이다. 익명으로 고발하고 이단을 재판하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의”를 진압함으로써 일치를 만들어내려는 환상 또한 그렇다. 가톨릭 신자들은 불만이 해소되리라 기대하며 각자의 입장을 긴장 속에 유지하며, 듣고, 대화하는 공동합의적 교회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여전히 책임은 권위가 맡고 있지만, 결정은 많은 이가 관여한 뒤에 내려진다.
또한 권위는 이제 더 이상 그 자체로 성직과 연계되지 않는다. 이번 새 교황령을 만든 핵심 가운데 한 명은 예수회 소속 교회법학자로 이번 5월 추기경에 임명된 잔프랑코 기를란다 신부다.
그는 새 교황령은 “교회 안의 통치의 권력은 성품성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법적 사명에서 온다”는 점을 명확히 규정했다고 확인했다. 이는 이제 (부제, 사제, 주교로 서품되지 않은) 평수사와 수녀들, 평신도들도 (교황청 부서의) 장으로 임명될 수 있다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한 미래의 부서장은 또한 반드시 추기경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또한 교회 권력과 성직 사이의 고리를 끊으려는 것이다.
이를 “평신도 힘키우기”라고 보면 더 큰 것을 놓치는 것이다. 이번 교황령의 뜻은 한 부서를 이끌 기회는 사제든 수녀든 주교든 다 똑같다는 것일 테다. 핵심은 지도력이란 것이 성직 여부와 교회 내 출세주의와 묶인 것이 아니라 은사와 직무와 연계된 교회가 나오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내포하는 바는, 일치(communion)가 상호 듣기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며, 신앙의 백성, 주교들, 그리고 로마 주교가 서로가 서로에게 듣고, 또한 모두가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공동합의적 교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2013)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의 성화하시는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께서는 신자들 전체에게 신앙의 본능, 곧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심어 주시어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 주십니다.”(119항)
교회의 전통은 사람들의 신앙을 통하여 전해 내려오며, 이를 주교들은 최종 해석자이자 증인이며 주 식별자, 즉 자신의 개인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신앙을 가르치며 전체 교회의 신앙을 증거하는 이로서 행위하는 교황과 더불어, 해석한다.(interpret)
교회 안의 권위는 다른 말로 영적이며, 밑으로부터 이뤄진다. 성령의 뜻을 발견하는 절차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예수님이 요한 복음에서 약속한 바를 진지하게 대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힘을 줄 것이며,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평화로 인도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할 것이다. 우리는 권위주의, 강압, 그리고 통제가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바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 하의 권력 전환은 조직 개편이나 새로운 절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원대하고 심오한 것이다. 최근 새 교황령에 대한 그의 인터뷰가 한 스페인어 책에 나왔는데, 그는 그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들 마음의 쇄신이다.”
이는 우리가 은총을 믿느냐, 또는, 우리의 옛 친구 펠라지오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방법을 믿느냐의 문제다. (역자 주: 펠라지오주의는 인간의 구원에 하느님의 은총은 필요 없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만으로 충분하다는 교회 초기의 이단이다.)
요한바오로 2세의 ‘착한 목자’가 서문의 거의 모든 문단마다 신앙의 일치의 보전과 규율을 강조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여기에서 일치(communion, 하나됨, 통교)는 또 다른 일치(unity, 단일함)와 동일한 것이며, 이는 “보전되고, 옹호되며, 보호되고, 촉진되어야 할 귀한 보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전을 수행할 이는 바로 교황청인바, 이를 이룰 사법적 권한을 받은 조직이다. 이를 이해하면, 왜 교황청이 주교들을 호되게 꾸짖고, 신학자들을 박해하며, USG(세계남자수도회 장상연합회)가 교황과 접촉함을 막는 것이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즉 “일치를 보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지 이해하기 더 쉬워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 교황령에서 교회의 목적을 교회가 받은, 자비를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사명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명은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맡겨진 것이다. 교회는 이 자비를 자신의 일치(communion)로써 증거하는데, 이는 그 어떤 인간적 기구에 의해서 다져지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이들, 주교들, 그리고 교황이 서로 기도 속에 들을 때 흘러나오는 성령의 은총으로서다.
교황령에서 규정된 전환은 매개(agency)에 관한 것이다. 이제 일치(communion)는 교황청 기구의 노력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합의적 교회에 의해 수용된 성령의 은총이다. 교황청은 이 은총의 원천이 아니며, 교황과 지역 교회 둘 다에 봉사함으로써 은총들의 교환을 촉진하는 가운데,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일의 핵심 매개 일꾼(agent)이다. 이 봉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수행하는 것인데, 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얼굴, 특히 가장 약하고 취약한 이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세 신부는 2003년 글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복음적 스타일은 존재할 수 있고 실로 존재한다”고 썼는데. 그 결과 소다노 추기경이 이끄는 로마 교황청에게 공격당해 공산주의자 말썽꾼으로 배격됐다.
마치세 신부는 베르골리오 추기경과 서로 알았고 1990년대에 있었던 수도생활에 관한 시노드에서는 함께 일했다. 그는 2012년 멕시코시티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직후, 그의 친구이자 동료 남미 수도자인 베르골리오가 교황이 되어 다른 곳도 아닌 로마 교황청 안에서 바로 그 복음적 스타일의 권위를 실행했다.
오는 8월 말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 추기경들을 모두 모아 이틀에 걸쳐 ‘복음을 선포하여라’를 공부한다. 나는 이미 다 했고, 그가 말할 것인바, 바로 이 말이다. “이제 가라, 가서 그렇게 하여라.”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모두가 교회 안의 폭력이라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게 말이다. (역자 주: 이번 8월 추기경회의는 지난 5월에 임명된 새 추기경들의 서임식을 겸한다.)
(오스틴 아이버레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기작가로, 교황과 함께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인 “꿈을 꾸자: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2020)을 썼다. 윗글은 오스카르 로드리게스 마라디아가 추기경의 책 “복음을 선포하여라 – 새 시대를 위한 새 교황청. 페르난도 프라도와의 대담”(2022)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쓴 서문을 인용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