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매월 두 번째 목요일에 '복닥복닥 동물 정원'을 연재합니다. 동물들과 살아가는 일상을 담은 칼럼을 맡아 주신 정청라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복닥복닥 동물 정원' 연재를 시작하며....

참 여러 가지 인연으로 동물들과 더부살이를 시작한 지 어언.... 몇 년인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데 십 년은 더 되었을 것이다. 처음엔 개 한 마리로 가뿐하게 출발했으나 지금 우리 집에는 고양이 여섯 마리, 산양 한 마리, 닭 열 마리, 셀 수 없이 많고 그 숫자 또한 매우 변화무쌍한 벌들까지(통 수로는 두 통) 다종의 동물들이 각자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아이가 많아서 생기는 말썽보다도 더 많은 말썽거리가 그들로 인해 벌어지고 있으며, 때로는 사람 식구에게 밥해 먹이는 것보다 더한 공력을 짐승 식구들에게 쏟아붓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야 물론 동물을 사랑하기 때문이죠.“라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을 말한다면 ‘어쩌다 보니(정신을 차리고 보니) 같이 살고 있었고, 같이 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보다 집요하게 들여다보자면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고길동 씨의 심정으로 "자식이 좋다 하니 할 수 없이 참고 사는 거죠"쯤으로 말할 수 있으려나?

그렇다. 나는 고길동이다. 나도 동물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만 하면 저절로 타샤 튜더 할머니처럼 될 줄 알았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맨손으로 밭 흙을 매만지다가 물컹한 고양이 똥의 촉감을 느끼고는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고길동, 자기 스스로 목줄을 나뭇가지에 친친 감아놓고 도와 달라고 발버둥치는 산양에게 ‘으이구, 웬수가 따로 없네’ 하며 욕하는 고길동, 진드기 잡아주려고 애쓰는데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나대는 개를 향해 막대기로 위협하는 고길동, 우리 집 목석 인간(박상아 씨)도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줄 때가 있는데 나는 오히려 발길질만 일삼으니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뜨아 하고 있는 고길동.... 짐승들 덕분인지 때문인지 만나게 된 나의 낯선 민낯 앞에서 나는 한참이나 혼란스러웠고 여전히 고민 속에 있다. 과연 우리들 만남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다 보면 고길동 씨도 개과천선할 수 있을까? 고길동이 개과천선한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엄마도 언젠간 고양이와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하며 다나가 그려준 그림. ©️정청라<br>
엄마도 언젠간 고양이와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하며 다나가 그려준 그림. ©️정청라

사실 그것 말고도 다른 여러 개의 질문을 품고 있다. 동서양을 가릴 거 없이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동물들과 사이가 좋은 것으로 나온다. 그중 어떤 이야기들은 동물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줌으로써 그들의 보답으로 자신에게 닥친 어떤 난관이나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또한 북미 원주민의 신화에는 동물과 사람이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까지도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그런 이야기들이 그토록 많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물론 이유야 대충 짐작이 되기도 하지만서도) 그 생생한 단서를 우리 집 짐승들과의 마주침과 부대낌 속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낼 수 있을지 어떨지 궁금하다. 한 침대에서 자겠다며 폴짝대는 개구리를 “아유 징그러워” 하고 집어던진 공주에게 일어났던 마법의 순간이 내게도 찾아올까? 그 공주가 내게 '변화라고 하는 마법은 불편함(이질감)을 직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이 연재를 준비하며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책을 만나고 심지어 온라인 세미나까지 신청해서 열심히 배움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 비밀이다. 그런데 세미나에 참석해 보니 해러웨이의 책을 나처럼 문자(제목) 그대로 이해하고 얄팍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이 지구적 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법과 영감을 얻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그런 것에는 전혀 기대조차 없었던 나에게는 뜻밖의 선물이고 발견이었다. 트러블, 골칫덩어리, 천덕꾸러기들이 나를 데려다 준 곳이 엄청난 배움의 장이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동물 식구들에게 감사해야 하려나?

언제나처럼 나는 글쓰기에 의지하여 현실적으로 닥친 그들과 나의 관계를 새롭게 배워나가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과 나를 뚝뚝 나누어 놓은 채 그들을 내 세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훼방자로만 인식하는 나의 견고한 태도에 대해 의심해 보고 싶다. 물론 의도대로 이야기가 흘러갈지 그건 모르는 일이지만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자세로 이야기하는 자가 되어 보련다. 다행스럽게도 이야깃거리는 무진장 많다. 말썽은 언제나 이야기를 남기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 트러블로 가득한 시간과 공간을 항해할 수 있는 지도를 읽는 감각이 있으면 좋으련만!" -"트러블과 함께하기" 53쪽에서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