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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는 필수,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한국사회에서 민중신학만큼이나 해방신학이 한물갔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벌써 아득하다. 그만큼 세상이 안녕하다는 전갈일까? 어차피 한국의 민중신학이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나 그 세계의 비참과 가난, 폭력과 억압의 상황에서 발생한 ‘상황신학’이니 상황이 종료되면 그 신학도 그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아직 그 반열에 살아남아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여성신학’을 꼽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불행이라 여겨야 할까?

최근 한국교회에서는 ‘사회교리’가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주교와 사제들이 덩달아 반색하고 나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낳은 한국사회의 양극화로 인한 가난, 강정 해군기지 등 전쟁과 폭력의 문제, 4대강 공사에서 확인한 생태계에 대한 무자비함 등은 한국교회의 일부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공분을 일으켰다. 그 참에 ‘사회교리 주간’도 생겨나고, 각 교구마다 빈사상태에 빠져 있던 정의평화위원회를 다시 복구하고, 사회교리 교육에 나서고 있다. 물론 여기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것은 강우일 주교가 ‘믿을 교리에 버금가는 행할 교리’를 강조하고 나선 탓이 크다.

라틴아메리카의 상황 속에서 해방신학이 나왔고, 한국에서는 개신교에서 민중신학이 출현해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사회운동에도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독자적인 상황신학을 내놓지 못한 채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2000년대를 맞이하고 있다. 2010년을 훌쩍 넘기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국책사업이 진행되는 구비마다 거리미사를 봉헌하며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이렇다 할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는 곳에서 사제들은 강론을 통해 사회교리의 구절을 반복해서 외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교리는 타협의 산물.. 우리시대 ‘상황신학’ 나와야

사회교리의 역사가 짧게는 1891년의 <노동헌장>(새로운 사태)으로부터 100년을 넘겼다. 사회교리의 영향을 받은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심각하게 숙고하고,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를 필두로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까지 사회교리의 개혁적 차원을 ‘해방’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여기서 탄생한 개념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다. 이 개념은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식적 사회교리인 <간추린 사회교리>(교황청 신앙교리성, 2004)에 받아들여졌다.

사회교리는 기본적으로 교회 내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 간에 타협의 산물이다. 시대의 요구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유럽 중심에서 ‘안전한’ 입장을 정리한 문헌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긴급한 과제와 조응하기에 사회교리는 턱없이 미흡하다. 특히 제3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더없이 애매한 게 사회교리다. 다만 공동선과 보조성, 그리고 연대성을 사회교리의 기본원리로 삼은 것에 의미가 있다. 이 원리에 따라 나라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조응하는 실천적 신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해당 지역교회의 ‘의식 있는’ 신학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성과들이 세계교회의 보편적 사회교리에 반영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지체’들의 당연한 책무다. 실상 ‘사회교리’(social doctrine)는 ‘믿을 교리’가 역사를 넘어서는 것과는 달리 역사의 흐름을 따라 진화하는 문헌으로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social teacting)이라 부르는 게 적당하다. 그래서 사회교리의 진화에 대한 신학자의 책임을 요청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경우, 지난 수년 동안 많은 사제들과 몇몇 주교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거리에서, 강가에서, 바닷가에서, 공장에서, 철거현장에서 미사를 봉헌해 왔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신학적 성과는 적고, 그마저도 조각난 것이어서 사회교리의 구절로 기워 입은 누더기 옷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제주교구의 강우일 주교는 한국교회의 유일한 신학자로 여겨진다. 강 주교는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를 비롯해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뿐 아니라 4대강 사업, 탈핵 등 한국사회의 심각한 쟁점이 발생할 때마다 적절하게 ‘세상을 위한 보편적 구원의 성사’인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며 복음적 성찰과 실천적 화두를 던졌다.

한국교회의 어느 사제와 신학자도 강우일 주교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일목요연하게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이가 드문 것을 보면, 한국교회는 너무나 안온하고 한국 신학자들은 너무나 게으르다. 하다못해 우리 사회의 정의구현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사제들조차 실천활동에는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지만, 자기 활동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는 인색하다. 신학적 성찰이란 단순히 제 행동의 정당성을 교회 안에서 입증하려는 노력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활동이 ‘하느님의 뜻에 머물도록 이끄는 일’이다. 내가 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에 내 몸을 내어주어야 함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해방신학은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화할 신학 자체가 없다"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신학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숙고해 보는 것은 당연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다. 여기서는 미카엘 뢰비가 쓴 <신들의 전쟁-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정치>(그린비, 2012)를 참고로 한다.

   
▲ 미카엘 뢰비, '신들의 전쟁―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정치', 그린비(2012).
먼저 밝혀둘 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은 다소 위축된 감이 있으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보통 해방신학은 바티칸의 보수적 공세와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 그리고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를 겪으면서 그 수명을 다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뢰비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해방신학에 타격을 준 것은 사실지만, 해방신학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비참과 가난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한다. 다만 1990년 니카라과 선거에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패배한 것이 더 큰 타격을 주었다고 전한다. 산디니스타 혁명은 한 세대 동안 그리스도교 활동가들을 고무하고 격려했던 가장 강력한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뢰비는 현재 해방신학이 투신적인 활동가들 안에 살아있으며,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거나 로마 당국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레오나르도 보프가 수도회를 나와 사제복을 벗고 평신도 신분으로 복귀했으나, 이는 단지 더 나은 표현의 자유를 얻어 더 나은 조건에서 투쟁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신학자들 사이에 차이는 존재한다. 교회 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보프 형제(레오나르도 보프, 글로도비스 보프)가 있는 반면, 사회적 실천에 집중하기 위해 교회 안의 문제를 일정하게 유보하자고 말하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해방운동에 헌신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한편 해방신학은 예전처럼 정치적 투쟁에만 머물지 않고 영성과 대중종교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개념도 단지 경제체제의 희생자들뿐 아니라 문화나 인종적 편견으로 억눌린 원주민과 흑인에게로 넓어졌고, 이중으로 억압받는 여성에게도 관심을 넓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방신학에 의해 영감을 받은 이들이 기초공동체를 확산시키면서 대중적 지지와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라틴아메리카 교회와 한국 교회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교회는 '신학적 성찰'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기초공동체'마저 거의 없다. 몇몇 가톨릭 사회운동 단체가 있지만 그 영향력은 아주 작고, 활동가도 손에 꼽을 만큼 적다. 그리고 교구에서 마련한 사회교리학교 등에서 새롭게 사회교리를 습득하고 있는 평신도들은 여전히 가톨릭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머물고 있다.

강우일 주교에게 배우자

해방신학의 효과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1994년 1월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시작된 사파티스타 봉기에서도 나타났다. 사파티스타는 멕시코 내 민주주의의 부재, 지주와 군대·경찰·지역당국이 가하는 원주민 공동체 억압, 농촌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책,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 정부의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규탄했다.

당시 멕시코 언론과 정부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저항하는 문정현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을 비난하듯이, 예수회 신부들이 사파티스타를 부추긴다고 비난했다. 특히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교구의 사무엘 루이스 몬시뇰을 ‘하느님의 게릴라’라고 몰아세웠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5년에 치아파스에 부임한 루이스 몬시뇰은 <해방의 성서신학>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는 예수회 신부들과 도미니코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7,800여 명의 원주민 교리교사를 양성하고, 2,600여 개의 기초공동체를 세웠다.

이들은 원주민들을 의식화하고, 원주민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도록 격려했다. 그래서 1993년 10월, 주멕시코 교황대사인 프리지오네 몬시뇰은 멕시코 당국의 요청을 받아 루이스 몬시뇰을 소환해 스스로 사임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루이스 몬시뇰이 로마 당국의 조치에 항의하며 불복하는 동안에 불쑥 사파티스타 봉기가 발생했다. 이를 진압할 수 없었던 멕시코 정부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과 협상하기 위해 중재자로 루이스 몬시뇰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해방신학은 대중과 사목자를 결합시켰다.

   
▲ 강우일 주교
마찬가지로 한국 보수진영에서 4.3 항쟁을 상기시키며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줄곧 반대해 왔던 강우일 주교를 '정치 주교'로 말하길 서슴치 않고 있음은 시사적이다. 강우일 주교가 자신의 활동에 대한 신학적 논거를 밝혀 왔고, 한국교회 안에서 소공동체운동을 가장 강조해 온 주교 가운데 하나라는 점 역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강우일 주교(주교회의 의장)는 지난 9월 15일 소공동체 도입 20주년을 맞이해 전주 전동성당에서 열린 모임에서 “소공동체의 존재 가치는 하느님의 계명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실천에 옮기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연대함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아울러 “예수는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교리나 깨달음을 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옛날 세상을 완전히 뒤집으러 오셨다”면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순례를 시작한 이들의 모임이지만 항상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존재하고,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명료한 신학이 분명한 사회적 실천을 낳는다

강우일 주교의 이러한 태도가 정진석 추기경이나 다른 주교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현실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에도 바티칸은 해방신학의 흐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바티칸 당국은 사회적으로 투신적인 주교들이 은퇴하거나 죽었을 때, 각국에 주재하는 교황청 대사들이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한 성직자들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이 새로운 주교들 가운데 여러 명이 오푸스데이(Opus Dei) 소속이다. 오푸스데이는 1928년 스페인의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신부가 창립한 단체로,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독재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티칸은 오푸스데이 소속 일곱 명의 사제를 페루의 주교로 임명했고, 네 명을 칠레의 주교로, 두 명을 에콰도르의 주교에, 그리고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엘살바도르,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주교로도 임명했다.

한편 바티칸 당국은 급진적인 성직자나 신학자들에게도 다양한 조치를 내렸다. 바티칸은 니카라과의 카르데날 형제 신부나 아이티의 아리스티드 신부의 경우처럼 소속 수도회에서 내쫓기도 하고, 엄격한 통제로 스스로 그만두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후자의 대표적 사례가 레오나르도 보프다. 그는 1992년 가르치는 것을 금지당했고, 가톨릭잡지 <보제스>(Vozes)의 편집장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또한 바티칸은 진보적인 경향을 띤 신학교들의 문을 에누리 없이 닫았다. 예를 들어 1989년 브라질의 제2북동부 지역 신학교(Serene2)와 헤시피신학교(Irter)를 폐교조치 했다.

   
▲ '오푸스 데이 성직자치단'(Prelature of the Holy Cross and Opus Dei, 단장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주교)이 대전교구에 이어 2011년 서울대교구에도 공식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서울대교구(당시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는 지난 2월 16일자 공문을 통해 "오푸스 데이 성직자치단이 지난 1월 21일자로 서울대교구장의 승인을 받아 교구에 진출했다"고 밝혔다.
1972년 이후 보수주의자들이 장악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의 대안으로 ‘라틴아메리카 수도회연합회(CLAR)’가 부상했지만, 연합회가 카를루스 메스테르스 등의 해방신학자들과 추진한 ‘말씀과 삶(Palavra Vida)’이라는 민중적 성서연구 프로젝트 역시 바티칸에 의해 금지 당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바티칸이 엘리트주의적이고 비밀스러운 네트워크인 오푸스데이뿐 아니라 포콜라레와 성령쇄신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과 대비된다. 뢰비는 당시 바티칸의 목표는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급진적이고 해방론적인 진영을 해체하거나 주변화, 중립화시키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점에서 오푸스데이가 한국교회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한국 오푸스데이는 1987년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거부당했으나, 1998년 처음으로 당시 청주교구장이던 정진석 주교의 승인을 받은 것에 이어 2009년 대전교구의 유흥식 주교에게 승인받았고, 다시 2011년에는 서울대교구의 정진석 추기경이 공식 승인함으로써 한국 오푸스데이 확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교리를 둘러싼 최근 흐름과 대치되는 교회 안의 또 다른 흐름이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고 ‘일상의 성화’를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재벌과 군부, 정치권력과 야합해 온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 환경의 변화는 한국교회를 갈등국면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서 가늠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 명료함’과 ‘기초 대중의 확보’다. 자기 활동에 대한 신앙적 확신을 고무시킬 수 있는 신학적 전거를 마련하고, 이러한 신앙을 내면화한 사제와 활동가, 신자들의 효과적인 네트워킹이 향후 한국교회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다. 1970년대에도 주교들 사이에 갈등이 많았으나, 당시 보수적 인사들은 유신정권의 폭압 속에서 명분을 찾을 수 없었고 대구대교구 등 일부 교구에서만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은 진보적 사제운동을 강화했고, 당시 발표된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들은 신학적으로도 상당한 깊이를 지닌 것이어서 그리스도교인으로 자처하는 한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한번 한국교회 신학자들의 진지하고 성실한 신학적 담론을 요청한다. 그리고 교회의 진보진영이 좀더 명료한 신학적 기반 위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그 작업을 강우일 주교 등 몇몇 사람에게 미루고 있는 한국교회 신학자들은 이제 직무유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신앙과 실천을 신학으로 해명하라.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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