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금)부터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전까지 5주간 '선거와 신앙인의 선택'을 주제로 주일 복음 묵상을 연재합니다. 집필해 주신 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영의 이끄심대로 광야에 가십니다.

광야는 한마디로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장소죠. 낮엔 엄청 덥고 밤엔 엄청 춥습니다. 일교차가 10도만 넘어도 환절기 주의하란 소릴 듣는데, 광야란 곳은 하루에 수십 도의 온도 차가 나는 극악의 환경을 자랑합니다. 당연히 끼니를 이어가는 것도 애초에 무리인 곳에 예수님이 40일이나 사셨습니다.

왜 하느님의 아드님이 광야에 들어가셔야만 했을까요? 세례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곧바로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하느님나라 선포 활동을 시작하셨어도 누구 하나 이의제기 할 수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한 답 중의 하나로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절절한 기도를 봅니다.

이 기도는 다시 말해 죽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이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역시 십자가 형벌을 두려워하셨음을 알 수 있는 거지요. 당시 누가 십자가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았겠습니까. 로마군의 잔혹한 채찍질을 수십 차례 맞으며 초죽음이 된 상태로 자신이 죽게 될 무거운 십자가를 직접 들고 형장까지 올라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옷이 완전히 벗겨진 채 질식하며 죽어가는 십자가 형벌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지금처럼 승리의 의미, 영적인 진보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공포 그 자체일 뿐이었죠. 로마 제국주의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원했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십자가형에 처해져 실패자로 낙인 찍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을 거고 그 십자가에 당신이 달릴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는 것도 잘 아셨기에 아버지 하느님께 죽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로 잘 알려진 대목 중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에 더 마음이 가 있음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거부하시면 승리의 부활은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단지, 예수님도 사람이셨으니 고통스런 죽음 앞에서 좀 흔들리셨나 보다 하는 정도의 생각에 머무르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그 기도가 몇 시간이 이어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 시간만큼 거부와 내어맡김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음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는 기도에는 반드시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용기가 생길 때까지 예수님은 몇 시간이 필요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다는 말이 진정으로 와닿습니다. 참으로 사람이셨기에 우리와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셨던 겁니다. 우리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울 때 머리와 마음, 몸이 따로 움직일 때가 있음을 체험으로 압니다. 역시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위 말씀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 그 자리에서도 죽지 않아도 된다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생각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고 여겨집니다. 악마들은 언제 어디서건 상황에 맞게 유혹을 해댈 수가 있습니다. 유혹해야 할 상대방이 흔들리고 있다면 말이죠. 예수님께서 기도를 계속하기가 힘드셨던지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깨어 있는지 보려고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어둔 밤에 세상의 고통을 홀로 어깨에 지고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조차도 힘드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살펴본 흐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40일 동안의 광야 생활이 마지막 여정인 십자가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단련의 시공간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음식, 남들보다 더 힘세지고자 하는 권세와 영광의 욕구,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존재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안전에의 욕구는 참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왕 중의 왕인 구세주로서 오셨던 분이기에 위 세 가지 유혹은 더욱 예수님께 특별히 다가오는 그것이 되었습니다. 왕은 굶주림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원하기만 하면 온갖 산해진미를 매 끼니 먹을 수 있는 존재요, 누구보다도 권세와 영광을 누릴 수 있고, 그 나라에서 가장 엄중하게 경호를 받는 가장 안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만약 원하신다면 악마의 유혹대로 사실 수 있었습니다. 아니, 악마한테 받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주신 권능을 사용하셔서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고,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누리며 경찰과 군대를 사용해 가장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셨던 거죠. 이것을 거절하셨던 분, 이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대통령에 적합한 후보를 알려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왕기리 기자
대통령에 적합한 후보를 알려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왕기리 기자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왕은 실질적 지배자가 아닙니다. 그 자리를 대부분 대통령이나 수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처럼은 아니지만 국가의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군대의 통수권자이자 한 나라를 대표합니다. 정치라는 영역에 뛰어든 사람의 최종 목표가 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동시에 오늘 복음 말씀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하는 그 내용과 직결되는 유혹을 받는 자리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역대 대통령들을 지켜봐 왔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그리고 재임을 하기 위해 공권력을 이용해 폭력을 행사하고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국민의 안위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을 악용했던 그들을 말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당하셨던 악마의 유혹에 통째로 빠져버렸던 겁니다. 악마들은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 동안 쾌재를 불러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자신과 가진 자들을 위한 빵이 아니라 국민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빵을 추구하는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자신과 가진 자들의 권세와 영광을 추구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주권을 드높이려는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진 자들의 안녕을 위함이 아니라 국민들이 필요한 보호와 안전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국민의 대리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통령에 적합한 후보를 알기 위한 방법을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의 삶이 그를 나타냅니다. 그의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앞으로 잘 하겠지 같은 개인적인 기대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획기적으로 변화하리라 기대하지 못합니다. 수 없이 경험해 봤기에 체험적인 지식이 이미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습니다. 수십 년을 살아온 대로 그렇게 대통령을 살아낼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견디어 내신 유혹에 빠져서 걸려 넘어진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더구나 정치라는 곳은 기본적으로 힘을 지향하고 있는 사회이기에 다른 곳보다도 어둠이 짙습니다.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과 후보를 알기 위한 노력이 요구됩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지혜를 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옳음이 곧 하느님의 옳음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내 힘으로 하느님나라를 건설해 낼 수 없습니다. 이 나라 건설의 주도권은 하느님만이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협조자, 협력자일 뿐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그분의 뜻을 여쭙고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기본 의무입니다.

현우석

의정부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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