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신앙인의 선택 1] 2월 6일 연중 제5주일 복음 묵상

2월 4일(금)부터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전까지 5주간 '선거와 신앙인의 선택'을 주제로 주일 복음 묵상을 연재합니다. 집필해 주신 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신앙인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다양한 신앙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에 닿으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과 내 정신과 내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운명’을 예수님처럼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벗을 위하여, 가엾은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은 조금은 가지고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과연 누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나요?” 하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나 먼저 나 자신이, 우리 가족부터 잘 먹고 잘 살아야 남을 도울 여력도 생기는 게 아니냐고 되묻고 싶을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족해야 예의를 차릴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말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 흠결이 있는 사람이지요. 미욱하고 나약한 구석이 있고,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 테지요.

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 기대어 한 걸음 더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이란 ‘완벽한 인간’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 모두는 죄인일 테지만, 그 죄 안에 머물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형제로 자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굳이 신앙을 위해 교부들처럼 사막으로 가거나 일부러 벌거벗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이라는 책에서, 로버트 엘스버그가 말한 것처럼 “세상의 흐름을 따라 표류하는 것에 저항하며 도전할 필요”는 있습니다. 매번 하느님을 응시하는 내 눈길을 피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부족한 신앙과 상처 안에서도 하느님께 닿을 수 있습니다.

까를로 까레또 수사님은 "도시의 광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추한 것이라도 그 속으로 빛이 들어가면 생기를 띠고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절대적으로 거부해야 할 것이란 하나도 없다. 퇴폐의 수렁이요 아스팔트의 정글인 대도시도 그 나름의 빛과 ‘투명성’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하느님은, 당신이 즐겨 머물러 계시는 특출한 ‘고장’이란 없으며, 오히려 모든 ‘곳’이 당신의 처소요,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나 당신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깨우쳐 주셨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만이 정수기처럼 추한 우리를 정결한 영혼으로 돌려놓으십니다. 오늘 제1독서(이사 6,1-2ㄱ.3-8)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뵙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하지만 이사야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랍(seraph, 천사)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들고 날아와,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당신의 예언자로 세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고결한 사람이 아니라 죄 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를 당신의 사람으로 파견하신 것입니다.

제2독서(코린1 15,1-11)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박해자마저 돌려세워 당신의 사도로 삼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오늘 복음(루카 5,1-11)에서는 더 놀라운 이이야기를 전합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일입니다. 밤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조언대로 하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무릎 앞에 엎드려 했던 말도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였습니다. 이 죄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에게 오히려 내 사람이 되어 달라고 청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그 자리에 있던 시몬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즉시 배를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죄인들의 공동체였던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기에,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엄청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깊은 데에 쳤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이 온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라 자처하는 잘난 사람들은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해도 정작 믿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먹고 살 만한 재산과 맘껏 살 만한 힘을 지녔다는 자신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느님이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이들은 ‘죄인들’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제 잘못을 뉘우치고, 언제든 사과할 용기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하느님만이 나를 살리실 것이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없이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변이 모두 재앙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많은 사람이 정치적 식견 때문에 갈등을 빚기도 하고, 대선 후보들에 대한 품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선거’라는 말도 들립니다. 어떤 이는 여야의 유력한 후보들을 싸잡아 “둘 다 나쁜 후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좋다, 나쁘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인품과 정치적 식견이 뛰어난 후보가 있다면 ‘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거룩한 성인을 뽑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공동선’을 위해 더 나은 후보가 누구일지 고민해야 합니다. 고단한 삶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상처와 흠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서 가르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정의로운 평화’를 이루는데 마음을 쓰고 실천해 왔던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6,34)는 말이 나옵니다. 개인의 입신양명과 길흉화복을 추구하는 미신과 점복, 주술이 아니라 예언자 전통에 서 있는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에 가득 찬 목자를 뽑아야 합니다. ‘가난’이 무엇인지 뼈에 새기도록 알아들었던 사람, 더 많은 이들의 행복을 기뻐하며, 이 땅에 전쟁 대신 평화를 뿌리내리게 할 만한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이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놈이나 저놈이나 나쁜 놈”이라며 딴청을 부리면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녀 마르타의 집 소성당 미사 강론에서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하고 묻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타인의 미래도 걸려 있습니다.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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