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신앙인의 선택 2]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복음 묵상

2월 4일(금)부터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전까지 5주간 '선거와 신앙인의 선택'을 주제로 주일 복음 묵상을 연재합니다. 집필해 주신 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오늘 복음에는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이 나란히 나옵니다. 마치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보건 위기로 갈라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행복 선언은 위기의 충격을 맨몸으로 이겨내야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나라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며, 웃게 될 것이라고 위로를 줍니다. 반면, 불행 선언은 이 위기에서 큰 이익을 본 사람들, 곧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웃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위로를 받았고, 굶주릴 것이며, 울게 될 것이라면서 회개를 요청합니다.

행복 선언은 이 위기의 시대에 위기의 피해자가 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그들의 일과 그 일을 하게 만든 신앙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나고, 모욕을 받고 중상을 당할 것이지만 행복하고, 그들이 하늘에서 받을 보상이 클 것이라며 용기를 줍니다. 반면, 불행 선언은 위기에서 큰 이익을 본 사람들에게는 남들이 그들을 부러워하고 좋게 말하더라도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정당한 노력을 통해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말씀이 부당하고 심지어 가혹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막신을 파는 아들과 우산을 파는 아들을 둔 어머니 우화처럼 ‘이익은 우연에 따른 것’이었을 뿐이라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겪었던 최근 위기들, 곧 외환 위기, 금융 위기, 환경 위기에서는 이익의 대부분이 기득권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반면 위기의 피해는 약자들이 고스란히 떠안았습니다. 위기가 거듭될수록 이 양극화 현상은 더 뚜렷해졌습니다. 이제 양극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이 피해가 대를 물릴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소수의 행복과 다수의 비극으로 나뉘는 이 구조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위기는 기존의 분열된 구조를 더 강화합니다. 경쟁에서 패한 자들을 더 밑으로 밀어내고 끌어당깁니다. 반면 승자는 위로만 올라갑니다. 멈추거나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운이 우연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라도 이런 현실을 바로 보아야 자신의 항변이 정당할 것입니다.

불행 선언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대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로 끝납니다. 이 말씀은 이 구조에서 이긴 자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을 편들면서 경쟁에서 패한 이들을 돕기는커녕 손가락질하는 우리 평범한 다수에게 토해내는 예수님의 사자후처럼 들립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누군가 부자가 되면 그가 부자가 되는 과정과 무관하게 그를 칭송하거나 부러워합니다. 그가 최고 갑부라면 사회적 상식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해도 쉽게 용인합니다. 그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돈을 벌다 내는 사고에서도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약자들이 못나 그렇게 된 것이니 약자 스스로 감수하라는 식입니다. 자신은 절대 그런 부자가 될 수 없음에도, 그런 부자를 만들어 주는 구조와 기회가 모두 닫혀 있음에도 부자 편에 섭니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행동한 역사는 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대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그렇게 강자 편을 들고, 같은 약자를 조롱하고 외면하다 결국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가 반복되면 자신의 자녀, 손(孫)자녀들에게까지 이 피해가 이어집니다. 눈을 똑바로 떠야 합니다.

저는 이번 대선도 이런 관점에서 봅니다. 후보도 후보지만 어느 정당에 위기의 수혜자들이 더 많은지 봅니다. 그 위기의 수혜자들의 과거도 봅니다. 이렇게 보면 위기의 수혜자들이 승자에게 유리한 승자독식 구조에서 늘 승자 편에 섰던 이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후보보다 이런 이들의 존재가 그 정권의 미래를 더 잘 예측하게 해 줍니다. 후보들이 다 도긴개긴으로 보인다면 그 다음 기준으로 그들에게 붙어 있는 이들의 면면과 그들의 과거를 보십시오. 어느 쪽에 위기의 수혜자들이 더 많은지 보십시오. 이들이 다음 정권의 정책에 영향을 주는 직책에 오를 테니 말입니다. 세 번째로는 이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들이 누군지를 보십시오. 이들 가운데 위기의 수혜자들이 많은 쪽을 경계하십시오. 각자가 할 일이 투표뿐이라 생각한다면 이런 기준으로라도 보고 바르게 투표하십시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보수가 되는 게 자연스럽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언론에서도 60대 이상은 당연히 보수적이라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말이 ‘젊어서 옳게 본 것은 비이성적인 혈기 때문이었으니 이만큼 살았으면 현실도 잘 알았을 테니 그 생각을 버리는 게 옳다’로 이해됩니다. 저도 일부 생각은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진리, 그 진리에 기초한 가치 기준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를 자신이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 가치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오늘 행복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병행구인 마태오 복음 5장 1절에서 11절까지의 ‘여덟 가지 복’은 이 행복 선언의 의미를 더 확장시켜 보여 줍니다. 이 선언에 비춰 보면 ‘세대’와 ‘시대’를 넘어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여러 이유로 억울한 일을 당하여 우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그들의 편을 드는 것은 신앙인이 마땅히 선택해야 할 가치이자 행동의 원칙입니다. 이 가치는 젊었을 때도 옳고 나이가 들었을 때도 옳습니다. 이런 가치와 태도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바뀐다면 자신의 마음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이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의 진리에 기반을 둔 바른 가치들을 ‘물가에 심긴 나무’에 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가치는 2독서에서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수준이 아닙니다. ‘되살아나심으로써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생물학적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에 근거를 둔 큰 가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가치를 위해 살다 ‘쫓김을 당하고 모욕을 받고 중상을 받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행복 선언’은 이천 년 전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한 행동의 동기가 됩니다.

오늘의 선택이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나머지 삶에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행복 선언’에 귀 기울이고 이에 충실한 선택을 할 때 더 많은 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이런 식별의 눈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