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일 만에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해서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했다. 인천국제공항에는 만 명에 가까운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그중 7642명은 3개의 전문 자회사를 통해 직접 고용될 예정이다. 인천국제공항 공사는 6월 22일 같은 달 말일 자로 협력사 계약이 종료되는 비정규직 보안검색 노동자 1902명을 ‘청원경찰’ 신분으로 전환해 직접 고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취업준비생(취준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가 이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왜 정규직 전환을 반대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불안감이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취준생들은 이들의 정규직 전환으로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소위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정규직 일자리를 통해서는 자신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취준생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불안감 뒤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불평등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의 출현과 불안한 미래

비정규직은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경제 회복을 위한 구제금융을 받으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급증했다. 이 정책은 자본이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동과 관련한 기존의 확고한 관계가 단기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의 형태”(김교성 외, "기본소득이 온다", 67쪽)로 노동시장의 변화를 가져왔다. 대기업을 비롯하여 많은 기업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그렇게 해고된 노동자들은 ‘단기적’이고 ‘개별적인 노동 형태’, 그래서 매우 불안정한 고용형태인 비정규직으로 다시 노동시장에 들어왔다. 전체 임금 노동자 중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2019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36.4퍼센트다. 이는 숫자로 거의 750만 명에 이른다. 물론 노동계에서 파악하는 비정규직 규모는 이보다 높다. 문제는 양질의 일자리가 늘지 않고 이런 비정규직이라는 불안한 고용형태의 일자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은 어디서든 값싼 노동력을 쉽게 확보할 뿐만 아니라 “임금수준의 격차를 확대(임금 유연화)하거나 해고를 쉽게 하는 방식(수량적 유연화)으로 ‘고용 없는 성장’”을(김교성 외, 55쪽) 주도한다. 이로써 좋은 일자리는 더욱더 줄어들게 된다.

일자리의 서열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한국의 노동시장에는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 같은 ‘내부자’(양질의 일자리)와 중소기업 재직자나 비정규직과 같은 ‘외부자’라는 서열이 존재한다. ‘내부자’는 대기업 정규직 14.5퍼센트와 공공부문 정규직 7.9퍼센트를 합쳐 22.4퍼센트 정도로 보고 있다. ‘외부자’에 속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뿐만 아니라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서 어렵고 불편한 생활을 강요받기도 한다. <한겨레>신문이 2019년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그해 6-8월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172만 9000원으로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55퍼센트 정도의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15086.html) 이런 임금 차별 외에 휴일 근무와 야간 근무를 떠맡아야 하고, 불황기에는 먼저 해고당하는 차별을 당한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고 한다. (조귀동, "세습중산층사회", 31쪽) 누가 비정규직이 되길 원하겠나?

(이미지 출처 = Pixabay)

경쟁과 좌절

많은 노동자가 이 서열의 윗자리(내부자)로 이동을 원하지만, 현실은 첫 일자리로 신분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즉 한 번 ‘외부자’는 영원한 ‘외부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하는 20대의 입장에서 첫 직장은 자신이 ‘내부자’인지 ‘외부자’인지를 결정하는 사활을 걸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조귀동, 23-26쪽) 이런 사활을 건 경쟁은 어려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교육은 높은 서열로 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기에 부유한 가정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라도 사교육에 집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스펙을 자녀에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 난다”란 말은 이제 비현실적인 표현이 되어 버렸다. 한 번 ‘외부자’가 영원한 ‘외부자’인 것처럼 더는 “노력은 실력이 아니다. 계층이다.”(조귀동, 144쪽) 그래서 가난도 세습된다! 

삶의 불안정성

삶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늘 불안정하다. 최근 우리가 겪은 폭우도 그렇고 지금 큰 공포로 다가오는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도 그렇다. 인간은 이 자연의 변화 앞에 상수가 아니라 변수다. 내가 자연의 힘을 꺾어야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생존할 수 있다.

이런 불안정한 삶 때문에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감이란 미래에 나타날 잠재적 위험에 대한 신호다. 이런 감정을 ‘나’는 없앨 수 없다. 그러나 불안감에 끌려다니면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늘 미래를 걱정하며 고립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를 즐기며 살기 원한다면 불안한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불안한 마음을 끌어안는다는 말은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럴 때 우리는 고립되지 않고 타인과 연결된다. 사실 타인과 연대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미래를 성취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건강한 미래를 만드는 방법이다. 인생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불안정성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실수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실수와 실패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적이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창조적 상상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공공부문의 정규직화는 공사가 직접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화가 대부분이다. 이는 정기적으로 계약을 갱신하지 않을 뿐 노동자들의 삶의 질의 개선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해 주기 위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로 몇 억, 몇십 억이라는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오직 노동을 통한 임금소득이 전부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 이후 ‘뉴노멀(New Normal)’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원래 ‘새로운 표준’이라는 의미의 경제용어다. 우리는 과거의 편안하게 느꼈던 것에 대한 갈망이 있겠지만 코로나 이후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있다. 이제 진정으로 ‘새로운 표준’을 이야기해야 할 때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자본 중심의 발전과 파괴가 아닌, 인간 중심의 자연 친화적인 삶으로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희망을 지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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