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1980년대 초반 영국은 보수당 정부 마거릿 대처 총리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철강산업에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철강업종에 고용된 많은 노동자들이 이 구조조정으로 실직자가 되었다. 영화 '풀 몬티'(the Full Monty)는 영국 요크셔 지방 셰필드의 한 제철소에서 구조조정의 칼바람으로 인하여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들의 삶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다. 직장에서 퇴출당한 뒤 어떤 사람은 이혼한 전 부인에게 양육권을 빼앗겨 자신의 아들조차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해고된 사실을 감추고 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척하며 온종일 거리를 배회한다. 또 어떤 사람은 실직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 시대 해고자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를 겪어 IMF로부터 구제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기업에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1997년에 개봉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여러 장면은 1997년 외환위기로 노동 현장에서 퇴출당한 한국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자들의 삶은 쉽지 않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로 인해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다. 쌍차 노동자들은 2009년 회사의 정리해고에 고강도 파업으로 맞섰다. 그러나 경찰은 대테러작전을 펼치듯 이 파업을 진압했다. 이미 파업 진행 중에 어떤 해고 노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떤 노동자는 생계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마치 영화 속 노동 현장에서 퇴출당한 사람들의 무기력함처럼 쌍차 해고자들의 삶 역시 그렇게 무기력해 보였다. 죽음의 숫자가 2012년 4월 3일 22명으로 늘어나자, 쌍차 노동자 지도부는 그 죽음의 숫자를 22에서 멈추려는 염원으로 4월 5일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쌍차 해고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기륭전자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이 대비되어 떠올랐다. 쌍차 노동자들과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두 투쟁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쌍차 해고자들은 엄청난 전투력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그들의 강도 높은 투쟁이 실패로 끝난 후 그들은 고립되는 듯 보였다.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 역시 긴 투쟁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싸우고 사람들을 모으고 끊임없이 자신들의 싸움을 사회에 알리며 자신들의 삶을 정치화했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고립되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다. 난 이 두 사례에서 남녀의 차이를 보며 쉽게 고립되는 남성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한국 남자의 남성성과 노동력이라는 생산성과의 관계가 궁금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은 생산 활동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 과정에서 남자들을 산업 전사로 수용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을 해야 하고 생산을 위해서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남성들은 노동시장을 독점해 자신의 노동력으로 가정을 위한 부를 축적하였고 가부장 권력과 권위를 획득하였다. 많은 노동자들은 생산력을 위해서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상대적으로 가족들과 적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 활동을 가정을 위한 가장 큰 사랑의 행위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구조 아래서 노동을 통한 생산보다는 금융 자본의 축적이 이윤 창출에 훨씬 효과적이다. 자본은 외국의 값싼 노동력과 불안정한 고용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으로 생산을 늘려간다. 이로써 노동의 가치는 의미를 잃고,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든다. 이런 노동의 위기는 ‘빈곤의 일상화’라는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김순영, “한국 민주주의와 빈곤문제”, 위기의 노동, 최장집 편, 266) 한편, 노동의 위기는 남성 노동자, 특히 현 50-60대 남성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생산을 위한 노동력보다는 소비를 위한 노동력을 중요시한다. 이 “소비 자본주의의 확산은 노동의 영역에서 남성적인 가치보다 여성적인 가치를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엄기호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권김현영 외, 166)

(이미지 출처 = Pixabay)

문제는 많은 50-60대 남성 노동자들이 산업 현장에서 퇴출당하면서 생계 부양자로서의 권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가출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곤 하였다. 이로써 한 인간의 그리고 한 가족의 관계가 한순간에 파국을 맞이했고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사람이 실직하였다고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노동이 삶의 일부이지 삶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남자들은 생산력을 삶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도록 양성되었기에 실직을 당한 순간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 여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짜 문제는 직장에서 퇴출당하였을 때 그들은 자신의 취약함을 가족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을 만큼 가족들과 친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스스로 고립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가출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이런 중장년의 남자들에게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주는 것은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문제를 잘 풀고, 과제를 잘 해결하는 일 중심의 ‘머리형 인간’을 선호했다. 이런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삶과 가정의 슬픔과 기쁨을 사사로운 것으로 여긴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잘 공감하지 못한다. 남들이 부정적인 감정이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할 때,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듯 정답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

그러나 삶은 무언가를 해결하거나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친밀한 관계는 한순간에 형성되는 관계가 아니다. 친밀한 관계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며, 먹고 마시며 울고 웃는 가운데 형성된다. 특히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약함을 끌어안으면 우리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 여유가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고 삶의 짐을 나눌 수 있게 한다. 남성성도 순화되고 성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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