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대표 이철순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사)한국희망재단 이철순 상임이사 ©가톨릭평론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영세 봉제공장 노동자이던 전태일이 분신한 사건은 한국사회뿐 아니라 교회의 노동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전태일 사건 이후 “공장 안에 교회를 세우자”(1973년 JOC 전국평의회 주제)라며, 운동의 중심을 ‘본당’에서 ‘사업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970년대 JOC 회원들은 저임금, 부당해고, 산업재해 등으로 위협받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며, 노동자들의 의식화 교육과 민주노조 설립 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곧 JOC 회원들은 정부와 사측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리며 해고되었고, 사업장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의 어려움이 이어졌다. 해고된 노동자나 노동운동에 투신하려는 JOC 회원들은 1970년대 말부터 각 지역에서 노동사목 설립을 주도하거나 동참하기 시작했다. 1977년 성남노동사목을 시작으로, 인천교구 부평노동사목과 부천노동사목, 전주교구 노동사목 등에 평신도인 JOC 출신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8년부터 JOC 확장위원으로 전주교구에서 노동야학과 노동사목을 시작한 이철순을 만나 1970-80년대의 노동사목, 특히 그가 평생 투신한 여성노동자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대표를 지내고 현재 (사)한국희망재단의 상임 이사로 활동하는 이철순은 "당당한 미래를 열어라: 세상을 바꾸려는 여성노동자들"(삶이보이는창, 2007)을 집필해 한국 여성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기도 했다.

전태일의 죽음, 부르심이 되다 

1970년 11월 13일, 고등학생이던 이철순은 친구가 버스를 타고 오다가 전태일의 분신을 직접 목격했다며 전해준 이야기를 들었다. 또래의 청년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살랐다는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저는 당시 아무런 의식도 없고, 그저 졸업 후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하려는 생각만 있었어요. 그런데 나랑 비슷한 나이의 어떤 사람은 자기 목숨을 바쳐가면서 저렇게 투신할 만큼 이 사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질문하기 시작했죠.”

그 질문을 끌어안고 방황하기 시작하다가, 어느 날 발걸음이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안에 들어가 십자가의 예수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인간을 사랑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처럼, 전태일도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불태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젊은 보좌신부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 말을 건넸다. 그가 우는 이유를 말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갈 수 있으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신자가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하자, 신부는 이철순에게 레오 13세 교황의 노동헌장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와 가톨릭교리를 담은 박도식 신부의 책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를 건넸다. 2권의 책을 다 읽고 다시 성당에 찾아가자, 그 신부는 대모까지 소개하며 곧바로 세례를 주었다. 그렇게 그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철순은 노동을 직접 배워 보려고 화양동에 있는 대동화학에 취업했다. 그는 인근의 화양동 성당에 가서 노동헌장을 실천하는 데가 어디냐고 묻자, 주임이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민후고(Hugh MacMahon) 신부는 JOC를 소개했다. 하지만 한두 번 나가본 JOC는 그에게 너무나 시시했다. 생활나눔 같은 것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나 싶어 그만 나갔다. 그런데 얼마 뒤 그의 안부를 걱정하는 JOC 지도투사의 편지를 받았다. 한두 번 나온 사람에게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며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사랑 나눔이라고 느껴져 마음이 바뀌었다.

배움에 목마른 여성노동자를 위해 시작한 야학 

그렇게 다시 JOC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는 생활나눔도 다시 보게 되었다. 1주일간 지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기의 삶과 주변을 잘 살피고 귀 기울이게 되었다. 1970년대 서울의 공단지대는 전자와 섬유 산업이 주력이었고, 대부분 10대 여성노동자가 일했다. 15-16세의 어린 소녀들이 어려운 집안을 돕기 위해 저임금의 고된 노동을 하면서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모두 집으로 보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철순은 그들의 고귀한 마음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런 희생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가 JOC 북부연합회 교육위원으로 대동화학과 인근의 유림통상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조합 교육을 하는데, 어린 여공들은 그에게 그 시간에 공부를 시켜 달라고 했다.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여공들은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이철순은 민후고 신부에게 성당에서 야학을 할 수 있게 장소를 빌려 달라고 청했다. 처음에는 생각해 보겠다던 민 신부가 몰래 교리실에 책상까지 새로 맞추고 공부할 수 있는 교실로 꾸며 놓아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렇게 시작한 ‘성심야학’의 입학식 날엔 학생이 70명이나 모였다.

민 신부는 그에게 운영을 맡으라고 했지만, 그는 가톨릭대학생회에 강학을 맡기고 자신은 1주일에 한 번 토론시간을 담당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학생들에게 제발 시험을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온종일 힘들게 노동하고 와서 2시간 공부하고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갈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순이’라 불리며 무시와 천대를 받던 이들에게 공부는 배움의 소망을 이루는 일, 노동자지만 공부도 하는 학생이라는 자존감을 심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목도 자기 생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국어, 한자 투성이인 근로기준법을 읽을 수 있는 한문, 일터에서 자주 쓰는 용어를 배우는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 이철순은 1주일에 한 번 노동자들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시간을 담당했다. 각자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너무도 가난한 삶의 현실이 한결같이 비슷했다.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 뼈 빠지게 고생하는 어머니,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오빠나 남동생을 공부시켜야 한다며 어린 나이에 공장에 일하러 온 그들의 사정이 너무도 비슷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눈물바다가 되곤 했어요.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는 그들이 정말 훌륭하다고 느꼈지요.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에게 자존감만 채워주면 엄청난 지도력을 발휘할 거란 확신이 들었어요.”

머지않아 그는 토론시간을 다른 노동자에게 맡기고 JOC 확장위원으로 다른 활동을 하러 갔는데, 그가 떠난 뒤 대학생 강학들은 약속을 깨고 검정고시를 준비시키겠다며 시험을 보기 시작해 노동자들에게는 버거운 배움이 되었다.

JOC와 개신교 도시산업선교회의 민주노조 운동 

이철순은 JOC 활동을 더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3년간 다니던 대동화학을 그만두었다. 당시에는 회사들이 노동자의 퇴직금을 떼어먹기 일쑤였다. 그는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회사와 이를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않는 근로감독관의 문제를 고발하는 운동을 했다. 열흘 만에 퇴직금을 받아낸 그에 대한 소문은 노동자들에게 전설처럼 퍼져나갔고, 사업주들에게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곳에 취업해도 곧 쫓겨나기 일쑤였다.

이철순은 JOC 확장위원으로 상봉동, 면목동 성당에서 새로운 노동자들을 만나며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과 아남산업 등 곳곳에 노동 조합을 일구어냈고, 1978년 인천 동일방직에 민주노조를 세우려는 조직운동도 도왔다. 당시 공석이 된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선거에 JOC 회원 이총각을 내보내기 위해, 그를 포함한 몇몇 활동가가 피정의 집에서 함께 밤새 기도하며 설득했다. 끝까지 버티던 이총각은 결국 “이게 하느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라며 마지못해 수락하고, 노조위원장 선거에 나섰다. 하지만 며칠 뒤 동일방직 대의원선거 때 민주노조를 반대하는 세력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만행이 벌어졌다. ‘동일방직 똥물사건’ 이후 이총각은 해고와 복직투쟁 등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너무도 하기 싫어하던 이총각을 억지로 설득해 내세웠던 이철순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며 울컥한다. 그 미안함 때문에 이철순은 동일방직 노조의 투쟁을 열심히 도왔다.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 대의원대회 때 똥물을 뒤집어쓴 여성노동자들. (사진 출처 =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추진위원회)

동일방직 사건을 비롯해 민주노조를 조직하고 지켜내는 싸움을 하면서 JOC와 개신교의 도시산업선교회는 함께 연대했다. 에큐메니컬 대표자 모임에 가면 개신교에선 목사들이 나오는데, 천주교에선 JOC 활동가들이 대표로 나갔다.

“대책회의를 하러 가면 개신교는 목회자 중심이었고, 우리는 평신도들이 대표자로 나갔죠. 천주교도 신부들 나오라고 하는데, 우리가 책임자라고 하면 개신교에서 이해를 못했어요. 나중엔 개신교 쪽에서도 평신도를 키워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전주교구 노동사목의 시작

사회운동에서 점점 대표자급 자리에 서게 되면서 이철순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쁨이 사라졌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JOC를 지도하던 전 미카엘(Michael Bransfield) 신부에게 상의하니, 전국을 돌아보라고 했다. 서울을 떠나 각 지역을 돌아보니, 전라북도에는 노동운동과 관련한 지원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철순은 전주교구에서 임무를 수행하기로 하고, 1978년에 전북지역 JOC 확장위원으로 파견되었다.

교구에서 가톨릭회관에 방을 마련해 주어 그곳을 기반 삼아 공단지역을 돌아보고, JOC 회원들을 통해 지역 현실을 파악했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느리다고 생각해, 대학생들을 모아 공단지역 실태조사를 했다. 지역 내 기업형태와 노동상황을 상세히 조사해 보고서를 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그 보고서를 마치 불온서적인 양 압수하려고 난리가 났지만, 전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제들이 중재하며 10부만 넘기는 것으로 막아주었다.

전북지역의 노동현실이 파악되자 이철순은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노동야학을 시작했다. 전주 팔복동 성당, 군산 팔마 성당, 익산 창인동 성당 세 곳에 야학을 열었다. 성심야학 때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대학생들을 먼저 모아 노동야학이 무엇인지 세미나를 하며 교재를 같이 만들었다. 노동야학에는 가톨릭 대학생뿐 아니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대학생과 일반 대학생 들도 참여했다. 과목도 국어, 한문, 영어와 더불어 역사를 추가해 지역 역사를 배우게 했다.

전주교구 노동야학 1기가 끝날 때 학생들이 국어시간에 쓴 시와 글을 묶어 문집을 만들어 졸업선물로 주었다. 자신의 글이 활자로 나온 것을 보며 노동자들은 엄청난 자존감을 얻었고, 전북의 대학가에서는 노동자가 직접 쓴 문집이 유명해졌다. 그렇게 발굴한 글 잘 쓰는 노동자에게 자기 현실에 대한 극본을 쓰게 해서, 크리스마스 때 노동자들이 직접 연극으로 올렸다. 노동자의 가능성과 특기를 살려주면서 노동야학은 급성장했다. 정부가 야학금지령을 내렸던 시 기였는데, 성당에서는 이건 불법이 아니라 선교 활동이라며 보호해 주었다. 그래도 성당 문 앞에 서서 지키는 정보원이 두려워 야학에 못 오는 노동자들도 생겼다.

이철순은 노동야학이 대학생은 봉사하고 노동자는 배우는 일방적인 공간이 아니라,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만나고 성장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1년 야학을 마친 노동자 중 3-4명을 뽑아 노동자와 대학생이 함께 공부하는 스터디반을 꾸렸다. 그리고 그 노동자들에게 다음 학기 강학을 맡기고, 노동자 강학의 수업은 대학생들도 듣게 했다. 야학 출신 노동자 강학들의 자부심은 엄청났고, 대학생들도 노동자에게 배우고 함께 나누면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이철순은 애초 전주교구에서 3년만 활동할 계획이었는데, 교구에서는 지금 떠나면 그동안의 활동이 다 무너진다며 그를 붙잡았다. 이철순은 교구에 노동사목을 제안하고, 2년 더 전주교구에 머물며 노동사목의 기반을 닦으면서 야학이 있는 3개 지역에 노동사목 실무자를 구해 놓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새로운 힘을 얻은 필리핀 유학과 아일랜드 연수

30대를 준비하러 돌아온 서울에서 그는 며칠 쉬지도 못하고 에큐메니컬 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로 불려가 노동과 빈민운동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을 담당했다. 안정되고 편안한 자리였지만 그는 현장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만두고 싶어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어서, 핑계 삼아 필리핀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필리핀 아시아사회과학대학교에서 NGO 활동가들을 이론적으로 재교육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그를 초청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요주의 인물인 그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아 지학순 주교의 도움으로 단수여권을 받고 힘겹게 유학을 떠났다.

필리핀에서는 새로운 이론과 낯선 문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2년의 교육을 마칠 무렵 그곳에서 만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가 아일랜드 성골롬반신학교에 ‘국제사회정의를 위한 정의와 믿음 특별연수회’라는 교육이 있다며 소개해 주었다. 선교사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는데, 자신의 활동이 정말 하느님이 원하시는 건지 돌아보고 선교 사명을 새롭게 하는 6개월짜리 연수였다. 그는 필리핀에서 아일랜드로 떠났다.

그 연수회에서 8시간 명상을 하던 이철순은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준 여인(루카 7,37-38)과 예수님을 만나는 특별한 체험도 했다. 그 여인과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드릴 게 없다고 울며 고백하자, 예수님은 이미 받은 것이 많다며 조용히 그를 안아주셨다.

“아일랜드 연수는 정말 좋았어요. 제가 걸어온 길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고, 그 일이 정말 옳은 일이었는지 성찰하며 확신과 자신감이 생겼어요. 예수님의 발을 씻어준 여인과 만남을 통해 제가 용서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죠. 산책하다가 앞이 훤히 보이는 길을 만난 것처럼, 앞으로의 내 인생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그 연수에서 큰 힘을 얻고 돌아왔어요.”

아시아 여성들을 위한 조직과 교육활동 

필리핀과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이철순은 잠시 전국노동사목협의회 교육부장으로 일하다가, 주위의 권유로 1988년 홍콩에 있는 아시아여성위원회(Committee for Asian Women, CAW)의 집행위원장에 지원했다. 아시아여성위원회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와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인간발전사무국(FABC-OHD)이 아시아의 여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으로 설립한 기구였다. 이철순은 이곳에서 일하면서 아시아와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한창 산업화가 이뤄지던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에서 가난한 여성노동자가 처한 현실은 한국의 197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철순은 그동안의 경험을 아시아 여성들을 위해 나눌 수 있어 기뻤다.

그는 에큐메니컬 조직이던 아시아여성위원회를 교회 밖 NGO로 독립시켰다.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는 소수인데, 다종교 사회인 아시아에서 다양한 여성들을 위해 일하려면 독립이 필요했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지도부는 아시아여성위원회의 독립을 아쉬워하면서도 그 필요를 인정해 승인했다.

“아시아여성위원회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함께 일하는 것을 많이 배웠어요. 교회 안이든 밖이든 일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교회 밖에서는 대표가 성직자가 아니라는 것이 좋아요. 현장을 잘 아는 평신도 전문가가 일하고 사제나 수녀는 보조하며 도와주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운동을 하면 자꾸 사제나 수도자가 지도자라는 명목으로 결정권을 가지려 해요. JOC를 창립한 까르댕 추기경도 청년 옆에는 선배가 있어야지, 신부나 수녀가 있으면 자꾸 교회 안으로 끌고가려 한다고 우려했죠.”

이철순은 아시아여성위원회에서 일하며 여성노동자와 빈곤여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과 교육을 진행했다. 아시아여성위원회는 여성운동과 노동운동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도 했다. 노동자들은 여성운동이 엘리트 운동이라 한계가 있다고 여겼고, 여성운동에서는 노동자의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소통하며 함께하는 운동을 만들도록 아시아여성위원회는 양쪽을 설득했다. 그가 연임하며 6년간 일하는 동안 아시아 곳곳에서 다양한 여성단체가 조직되었고, 아시아여성위원회도 크게 성장했다.

다시 여성노동자의 곁으로 

임기를 마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이철순은 그린피스 동아시아 활동이 시작되도록 잠시 돕다가, 1996년부터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IMF가 터지면서 그동안 힘겹게 쌓아온 여성노동자의 지위나 보호망이 다 무너지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등 거대 노동조직에서도 여성노동자의 문제는 뒤로 밀리곤 했다. 그는 참여연대와 함께 해고당한 여성노동자들의 실태조사와 실업자 등록운동을 추진하고, 기초생활보장법 등 사회적 보호망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주체로 한 전국여성노동조 합 설립도 이끌었다. 정부가 시민사회단체의 여러 정책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여성정책도 많이 바뀌고 여성노동자를 보호하는 여러 법과 제도도 마련되었다.

이철순은 9년 동안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대표로 활동하다가, 자신이 없어야 후임자가 편히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다시 아일랜드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선교사를 위한 안식년 코스였는데, 다시 한번 자신의 운동을 돌아보고 재충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론, 양자신학(Quantum Theology), 생태신학 등을 공부하면서 또 한 번 힘을 얻었다.

“교수 신부님이 그리스도론 수업을 하는데 성경책을 휙 던져서 다들 깜짝 놀랐어요. 신부님은 그건 그냥 책일 뿐이라며, 그 안의 내용 을 실천할 때 중요한 거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런 식으로 저에게 필요한 영적 지식을 얻었죠. 내가 믿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깊이 다가가는 시간, 그런 시간이 필요하고 참 좋았어요.”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이철순은 여성노동자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일하는 여성 아카데미’를 시작했다. 좀 더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서, 민중교육 방법론을 가르치는 남아프리카 파울로프레이리학교(South African Paulo Freire Institute, PFI)에 연수를 갔다. 그곳에서 배운 이론으로 여성의 리더십이나 사회의식교육 등의 현장교육 커리큘럼을 마련했다. 또한 그는 2005년 12월 창립한 국제구호기구인 한국희망재단의 상임이사를 맡아, 전 세계 빈곤 지역의 개발과 교육사업을 지원하는 일도 시작했다.

“한국희망재단의 일과 노동운동은 하나도 다를 게 없어요. 일의 대상이 다를 뿐 방법은 같습니다. 자금지원과 더불어 사업을 추진하니 더 실행이 잘됩니다. 꼭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진 않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 있는 이들은 여성이에요. 여성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신의 권리를 찾도록 한 것처럼, 조혼과 여성할례 등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협동조합이나 마을공동체에서 함께 힘을 모으고 경제력을 갖게 해서 힘을 주는 것입니다. 우연히 시작한 일이지만, 그동안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고 저에게 아주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속에서 누룩이 되는 신앙인이 되길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산화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사고로 죽어 나가고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여전 하다. 특히 이번 코로나 사태 때 콜센터나 요양관리사 등 여성 노동자들은 집단 감염에 쉽게 노출되기도 했다. 그래도 사회에서는 노동자들과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불편해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물론 1970년대와 비교하면 힘이 늘긴 했지만, 대기업 중심의 노조만 보고 전체를 비판할 수는 없어요. 어느 나라든 약자는 항상 농민과 노동자이고, 인공지능의 시대가 되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물론 노동운동도 시대 변화에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가야죠. 저는 노동 운동이 시민운동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캐나다에서 노동조합 강연을 하는데, 마을공동체 회관에 500여 명이 모였는데 노조 관계자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노동자이고 아니고를 가르지 않고, 시민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같이 다룰 수 있는지 고민하더라고요. 참 부러웠어요.”

오늘의 교회는 노동자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르치는 대로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안에 교회를 세우라고 하시잖아요. 예수님의 몸을 모신 신자들 이 세상 속에서 누룩의 역할을 하도록 교회가 가르치고 그런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예전에 전 미카엘 신부님이 그린 그림 중 예수님이 성당에서 나오려고 애쓰는데 사람들이 문을 잠가 못 나오시는 모습이 있었어요. ‘예수님은 너의 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 달려 있었는데, 그 손은 도움, 나눔, 연대 등이 될 수 있겠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게 교회의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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