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나는 1980년도에 재수생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노량진에 있는 입시학원 종합반을 다녔다. 수험생 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늘 시간에 쫓겨 마음의 여유를 잃고 살았다. 그리고 1995-96년에 수도자로서 노량진 가톨릭 노동청년회 전국 본부에서 일했는데 노량진역 주변 분위기는 내가 대입 수험생으로 경험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입시학원뿐 아니라 공무원과 그밖에 전문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원이 밀집해 있고, 인생 성공을 꿈꾸며 시험공부에 전념하는 수험생과 취업 준비생 수만 명이 모이는 지역으로 변해 있었다. 수험생이나 취업 준비생에게 활기찬 삶을 기대하기 어렵듯이 이 지역은 그 자체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다.

당시의 나는 가톨릭 노동청년회 회원들과 노동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입 수험생과 취업 준비생의 삶의 애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25-26년이 지난 지금 노량진역 주변은 주로 ‘컵밥’과 같은 ‘길거리 음식’으로 유명해졌다. ‘길거리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여행 정보지에도 소개된다. 그러나 이곳에 어떤 종류의 학원이 밀집해 있고 수험생들의 삶이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길거리 음식’에 관한 소식보다는 학원가 일대의 코로나19 확진자 발생과 이로 인한 경기 위축을 걱정하는 뉴스가 주를 이룬다.

노량진 거리에서 파는 컵밥. (사진 출처 = Pixabay)
노량진 거리에서 파는 컵밥. (사진 출처 = Pixabay)

한편, 공무원과 전문직과 같은 직업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수만 명의 취업 준비 수험생들에게 ‘길거리 음식’은 별미를 즐기는 ‘맛집 탐방’ 같은 즐거운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시험공부에 전념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고 또 경제적 여유도 없다. 이들에게 ‘길거리 음식’은 저렴한 가격으로 짧은 시간에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음식일 뿐이다.

자극적인 ‘길거리 음식’으로 한 끼를 때우는 생활도 쉽지 않지만, 수험생들은 심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니 시험은 그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두 번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더 큰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자존감은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생활을 몇 년째 하고 있는 수험생도 생각보다 꽤 많다고 한다. 가끔 이들 중 어떤 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의 마음을 황망하게 한다.

‘예수 수도회’라는 한 수녀회는 2016년부터 가난의 다른 형태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으로 지지와 도움을 주기 위해 노량진 학원가에 ‘메리워드 청년공간’을 열어 그들에게 점심을 대접해 오고 있다. 이 활동에 노량진역 근처에 위치한 성당 신부님도 적극적인 관심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는 젊은 청년들의 좌절에 공감하여 그들을 위해서 작은 공간을 운영하기로 결정한 수녀회에 감탄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최근 나도 두 차례 그곳을 방문해서 수녀님들과 함께 점심을 준비하고 그곳을 찾아오는 젊은 청년들을 맞았다. 앞으로도 한 달에 2회 정도 정기적으로 점심 봉사를 할 계획이다. 내가 청년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청년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그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며 그들의 원의를 배우고 싶고, 그들이 진정으로 살고자 하는 삶을 축복해 주고 싶다.  

2015년 2월, 노량진 거리의 컵밥 노점상들. (사진 출처 = Flickr)
2015년 2월, 노량진 거리. (사진 출처 = Flickr)

청년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삶보다는 사회에서 정해 놓은 규범과 사회와 타인이 원하는 삶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보통 청년기에 들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회가 정해 놓은 규범과 길을 배우며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은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순응하며 자신의 원의를 억압하거나 자신의 진정한 원의가 무엇이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다시 도전하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늘 우리에게 풀어야 할 숙제를 내준다. 긴장과 갈등을 느끼거나 실패로 인해서 좌절을 경험한 때가 바로 그 숙제를 풀어야 할 시기인데, 이는 다름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라는 초대다.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삶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정한 원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이 세상과 타인이 기대하는 삶과 다를 수도 있다. 나는 뻔한 삶, 그리고 획일화된 삶을 사는 것보다 자신의 원의를 좇아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개인의 성공과 행복이 단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열심히 산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소모품 취급을 당하고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로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 나는 이런 그들의 실패와 좌절이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노동을 하찮게 보는 사회적 정서의 문제이고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경쟁이 격화되는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다. 열심히 산 사람들에게 좌절만을 안겨주는 사회는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사회다. 그 잘못된 구조에서 청년들은 신음하고 있다. 청년들 제각각의 삶을 축복하기 위해 나도 잘못된 구조를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불행하게도 요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향 조정되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청년공간도 도시락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전환했고 그나마 찾아오는 청년의 수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이 코로나 블루를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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