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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강신숙 수녀] 3월 15일(사순 제3주일) 탈출 17,3-7; 로마 5,1-2.5-8; 요한 4,5-42

정현종의 시구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일생만 오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가, 혹은 한 역사가 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수천만 년을 끌고와 내 앞에 서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인데 우린 그 사람을 놓치고 만다. 목마른 것을 제외하곤 어떤 공통분모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는 ‘야곱의 우물’을 사이에 두고 무심히 오간다. 우리는 모두 가늠할 수 없는 자신들의 세계를 끌고 오지만, 그 세계가 어떻게 엄청난 사건이 될 수 있는지는 짐작하지 못한다.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예수의 도발로 시작되었다. 그는 사마리아 여자와 눈길을 주어서도, 말을 건네서도 안 되는 유대인이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남자와 여자가 지켜야 할 금기 면에서 말을 섞는다는 건 심각한 반칙이다. 두 사람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요한 4,7)는 이 낯선 남자의 요구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9) 두 사람 간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고도 두 사람의 대화는 한참이나 엎치락 뒤치락을 이어 갔다. 물을 청하던 이가 다시 물을 줄 수 있는 자로 바뀌는가 하면,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10)를 알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것이 생수를 얻게 될 조건이다. 그러나 무슨 수로 그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거짓말은 ”내가 그 사람을 잘 아는데“ 하는 말이다. 편견의 사람에게 편견을 떼고 생각하라는 건 살점을 뜯어내는 일과 같다. 그런 불가능한 요구가 여인에게 제시되었다. 

예수는 그녀를 그렇게 제3의 영역으로 밀어냈다. 그녀가 살던 땅, 그 대지의 딸이 자신을 제대로 알고, 대상을 알아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통과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자 최종적 관문이 될 것이다. 마침내 그녀가 ‘그’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실로 이 낯선 나그네가 우물을 남긴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자인가? 우물은 대대로 우리를 살려온 원천이 아니던가? 자기 물에 갇혀 있던 그녀는 자신이 알던 과거의 물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새로운 물’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선택은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섬’이다. 마침내 여자가 야곱의 우물에서 시선을 떼고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15)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두초 디 부오닌세냐. (1310-11) (이미지 출처 = ca.wikipedia.org)

그러자 예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화제를 옮겨 갔다.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는 뜻밖의 요구가 여인에게 내려졌다. 예수의 이런 화법은 누가 봐도 친절하지 않다. 그는 여인이, 여자여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삶의 조건, 상처 나고 은폐해 왔던 과거를 소환한다. 예수의 계속되는 도전은 응답과 상관없이 다음, 또 그 다음 스텝으로 건너뛴다. 건너뛰면서 여자가 입고 살아온 세계를 하나씩 벗겨 낸다. 아니, 여자가 지탱해 온 세계를 가장 밝은 대낮, ‘정오의 태양 아래서’(6) 발가벗긴다. 그러자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들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들이 조금씩 속내를 드러냈다. 차마 대면할 수 없었던 영역들, 기억 저 멀리로 폐기되곤 했던, 그래서 때로 마주하기 힘들었던 진실이 건드려졌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였다. 그것은 그녀의 능력 외부에 있는 힘이어서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철저히 소외된 영역인 것이다. 예수가 그녀의 그런 곳을 건드렸다. 그녀가 붙들려 있는 곳, 그 불가항력의 장소를 파고들었다. 

예수가 남편을 데려오라 하자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편이 없다“는 말로 응수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 예수는 개의치 않고 일일이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남편들을 언급한다. 언급하면서도 그녀가 ”바른대로 대답하였다“(17-18)고 말해 준다. 이 무슨 말인가?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응수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통상적인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예수가 건드린 ‘남편’은 그녀의 세계가 정한 프레임에서 온 것이니, 그 틀에서 벗어난 그녀의 대답은 옳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준 예수로 인해 여자는 ‘남편들’이 있는 여자에서 없는 여자로 거듭났다. 비로소 여자가 깨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질문의 주도권이 여자에게로 넘어왔다. 그녀가 조상들의 산과 예루살렘에 대해, 예배 장소와 그 진정성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이 물음에 돌아온 예수의 답변은 실로 엄청나다. 답변은 매우 도발적이고 논쟁적이다. 당시의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어질 앞으로의 세대에도 그럴 것이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21-24) 그러자 여인이 화답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답하였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5-26) 

예수의 살아 있는 물은 다른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힘이다. 그 물을 마신다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자신을 상처 낸 공동체로 돌아갈 힘이며, 예수를 증언할 힘이고, 사람들을 해방에 합류시키는 힘이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하나의 원형을 제공한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며,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일생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가, 혹은 한 역사가 오는 일이라는 것, 그 만남은 이런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마실 물’을 좀 달라 청하면, 그때, 그 말을 건네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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