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3월 1일(사순 제1주일) 창세 2,7-9.3,1-7; 로마 5,12-19; 마태 4,1-11

오늘 광야에서 받은 예수의 유혹은 앞으로 예수가 직면할 세계의 실체를 보여 준다. 예수가 받은 유혹에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근원적 욕구와 힘(권력)의 욕망이 가장 첨예한 방식으로 나타나 있다. 악마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악마는 한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을 타고 약한 고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예수의 첫 번째 유혹이 사십 일간의 단식 후에 찾아왔다. 극도로 시장했을 때 유혹자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이 되게 해 보라고 부추긴다. 유혹자는 허기진 예수를 제대로 건드렸다. 그는 마치 에사오의 장자권이 그러했듯이 ’하느님의 아들‘을 끼워 넣었다. 예수의 정체성이 빵과 한 끗 차이로 엇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악마가 노리는 빈틈은 예수라는 한 개인이 아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그가 장차 세울 세계의 무력화다. 물론 예수는 그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았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며 악마를 물리쳤다.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엔 온갖 갈망이 탈선된 욕망과 뒤섞여 있다. 누구도 그것을 명확히 분리해 내기란 쉽지 않다. 악마는 바른 양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양심처럼 ’보이는‘ 소리로 다가온다. 슬며시 ’추구‘의 틈새를 벌려 바르게 보이도록 하면 된다. 그러면 당사자는 의식하기도 전에 알아서 미끄러져 내릴 것이다: “과연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럽다.”(창세 2,6) 이렇게 태초부터 악마는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가장 밑바닥을 건드려 왔다.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거나 혹은 신적이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4-5) 이렇듯 악마는 세상을 가리는 자며,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하는 자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게 하는 자다. 그는 진짜 보아야 할 것과 들어야 할 것을 가린다. 한마디로 그는 세계를 동원하고, 세계에 기생해서 인간의 탈선을 추동한다.(마태 4,5-8 참조) 뱀이 노리는 것은 총체적 파국이다. 에덴의 동산, 신과 함께 거닐던 장소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 그것이다.

'에덴 동산', 루카스 크라나흐.(1530) (이미지 출처 = ko.m.wikipedia.org)

악마는 인간이 무엇을 열망하는지, 그 열망이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지 잘 알고 있다. 악마가 첫 인류에게 들고 온 유혹은 천박하거나 속물적이지 않다. 놀랍게도 그가 내민 것은 생사불멸과 깨달음, 선악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화두였다. 단, 너희가 “그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되었다. 그 경계를 넘어서기만 한다면, 너희는 가히 신의 경지에 등극할 것이다. 이렇게 악마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오가며 그들이 공존하는 생명의 땅을 질투했다. 악마는 관계와 공존을 파멸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의 거짓말이 숙주로 삼을 수 있는 발판은 유일했다. 인간이 지닌 결핍을 자각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열매는 ’보기에도 탐스러울‘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확신이 생기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다. 더불어 살아가던 힘(생명)이 ’내 것‘으로 바뀌게 된 이유다.   

악마가 예수를 “성전과 산꼭대기”(마태 4,5.8)에 세운 것도 정상에 취해 정상을 떠받치는 자들을 가리기 위해서다. 21세기, 천하를 제압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제 자신의 목표치를 거의 달성한 듯해 보인다. 그것을 알리는 지표들이 연일 무서운 속도로 경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국제단체 퓨처어스(Future Earth)가 공식적으로 52개국 과학자 222명을 대상으로 ’세계적 위험‘을 묻는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그중 집계된 ’세계 5대 위험‘에 “기후변화 대응 실패, 기상이변, 생물다양성 감소, 식량 위기와 물 부족”이 나왔다. 지속적으로 발표되어 온 결과가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두려운 것은 어느 날 이런 경고음조차 꺼지고 더 이상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때가 오는 것이다. “침묵의 봄”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새로운 공포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단연 '신종' 바이러스들의 출몰이다. 온 나라가 바이러스와 한판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이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어떤 정치, 종교 단체는 정략적으로 공포를 유발하고 방치한다. 실로 인간이길 포기한, 신종 바이러스에라도 붙어서 정권을 쟁취하겠다는 그들의 빗나간 위기의식이 안타깝다 못해 측은하다.  

질주하는 기관차를 멈추라는 외침은 당장의 손익계산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고 만다. 국가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인의 구원을 외치는 종교들도, 그 산하의 종교 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손익계산을 맞추느라 그들은 고장난 브레이크의 작동을 멈출 여력이 없다. 계산이 끝나면 그때 브레이크를 의식할까? 그것도 모르겠다. 문제는 기후 위기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가난한 국가와 사람들을 먼저 친다는 데 있다. 부자 나라들은 이 사실에 애써 눈 감고 있지만 정작 이들을 방치한 대가가 고스란히 자신들에게로 돌아온다는 계산은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우린 여전히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해야 할까? 물론 악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긴 한데 그것은 단연 사람들이 깨어나는 일이다. 사람들이 깨어나 자신을 지배해 온 실체를 알아채는 일이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 온 악마의 작전에 마침내 ’브레이크가 걸렸다‘고 오늘 복음은 전한다. 깨어난 자, 세계를 일깨울 그 첫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예수의 등장으로 사탄의 세력들이 와해되고, 마침내 세계가 악마의 손에서 풀려나기 시작했다. 하느님나라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것이다. 희망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으니 아직 낙담하기는 이르다. 이제 우리가 그와 함께 나서서 이렇게 말할 차례가 왔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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