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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강신숙 수녀] 4월 26일(부활 제3주일) 사도 2,14.22ㄴ-33; 1베드 1,17-21; 루카 24,13-35

수 개월째 블랙홀이 되고 있는 코로나19 덕분에 바이러스에 대한 상식이 급증했다. 바이러스는 일단 '세균이 아니'라 하고, 그저 '불완전한 세포구조에 핵산을 둘러싼 단백질 껍데기'라 한다. 그러다 제1, 제2 숙주에 안착하면서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해간다. 공식이 따로 없는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는 것인데, 특히 동물에서 인간으로 넘어올 때가 그러하다. 물론 바이러스만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모든 원인의 배후에는 숲을 파괴하고, 수십억 동물을 공장식 밀집 형태로 사육하거나 학대해 온 인간이 있다.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이들과 연결고리를 갖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제인 구달이 경험한 바대로 이 속에 매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윤리적 선택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러니 건강한 숲과 생태계를 원한다면 그 속에 내재된 빈곤 문제 역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마땅하다.

이미 아수라장 난 세계지만 흔들리며 걸어가는 인류 곁으로 부활이 다가왔다. 최근에 일어난 이 모든 사태를 암울한 심정으로 견딜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을 건넸다: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이런 질문은 요즘 같은 난국에선 엠마오의 두 제자보다 더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러니 돌아오는 대답은 클레오파스의 반문 이상이다: "최근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그는 재차 되물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19) 이때 제자들이 멈추어 섰다. 그들이 멈추어 서서 근자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비록 엉망이 된 사건의 나열이라 쳐도 잠시 멈추어서 돌이켜볼 시간은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최근의 사태와 이후 전개될 향방에 대해 걱정이 많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분분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 기대하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물어야 한다.  

절대 바이러스를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사태로 세계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속도제어가 불가능해 보이던 ’세계화 시스템‘이 일단 멈춤으로 돌아서자 그 실체가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세계는 정말 운명 공동체라는 것, 내 국가만 보호해서는 절대로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는 완벽한 의료시스템을 자랑하던 부자 나라들에게 유독 뼈아팠다. 그래서 이참에 이들 나라가 자국 담장만 공고히 할 것이 아니라 전체 지구적 차원에서도 그리했으면 하고 바란다. 팬데믹은 결코 단독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팬데믹은 개발, 기후, 빈곤, 광범위한 생물종의 몰락 등과 함께 얽혀 있다. 그러니 한 가지 현안이라도 종합적으로 접근해 나가야만 풀 수 있다. 지구인들이 의식을 바꾼다면, 지금처럼만 긴박하게 움직여 준다면, 그나마 실낱 같은 미래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유하며 저녁식사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엠마오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해 들려주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으며,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셨습니다."(19) 이들의 말은 모두 과거시제로 끝났다. 그때는 희망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소리다. "최근 (죽었던)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20)면서도 여전히 부활은 근거 없는 소문으로 치부되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면 뭣하나? 예수를 알아보는 것은 그와 산 시간과는 별개인 것이다. 엠마오로 떠난 제자처럼, 이천 년간 ’예수‘를 앞세운 교회가 가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들이, 그리고 지금 우리가 너무 무기력해 있다는 것이다. 너무 침통해서, 더는 가망 없는 희망을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엠마오로, 혹은 어딘가로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현실적 절망에 어떤 희망도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탄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고 그는 (....)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었다“(26-27) 이때 예수는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성경 공부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그는 흔하고 뻔한 성경학자가 아니다. 사건 속에서 표징을 읽어내지 못하는 박학다식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우리에겐 엠마오의 제자들이 느낀 그 뜨거움이 절실하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하느님 계시의 본질이었으며, 예언자들이 감당해야 할 길이었고, 굴할 수 없는 열정이요, 소명이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예수가 빵을 뗄 때, 길에서, 식탁에서, 모든 행동에서 스승 예수가 살아 있음을 알았다.  

부활의 실제 메시지는 예수 자신을 위해 있지 않다. 예수가 못내 사랑한 이들에게로 향해 있다. 그가 혼신을 다해서 한 행동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향해 열려 있었는지를 보면 안다. 우리는 그 확실한 증거를 초대교회에서 발견한다. 초대교회는 어둠에 갇혔던 이들에게 어떤 희망이 되었는가? 숨어 있던 은신처에서 저잣거리로 뛰쳐나와 전에 없던 용기와 확신을 보여 준 것,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희망의 증인이 된 것이 아닌가? 그들은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들 자신이 이미 예수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모태서부터 불구였던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시오, 하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사도 3,1-10)했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힘을 키워 주고, 자포자기해 버린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며,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예수 부활 이후 달라진 제자들의 특징적 행동이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모습에 전율했다. 제자들이 엠마오의 예수처럼 인류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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