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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 빈 무덤이 던지는 물음[강신숙 수녀]주님 부활 대축일(사도10,34ㄱ,37ㄴ-43; 콜로3,1-4; 요한20,1-9 또는 마태28,1-10)

코로나바이러스-19로 온 세계가 패닉에 빠졌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미증유의 사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른다. 재의 수요일이 오기도 전에 걸어 잠갔던 성당에도 봄은 오고 부활이 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공황 상태다.

얼마 전, 유발 하라리 교수가 <파이낸셜 타임스>에 낸 기고문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현 사태를 인류 최대의 위기로 규정하면서 각국 정부들이 내린 결정들, 국경 봉쇄, 개인과 공동체간의 통제와 같은 다양한 측면들이 미칠 영향력에 대해 분석했다: “당장의 결정들이 위협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폭풍이 지나간 뒤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 안전을 중시한 통제적 사회로 전환될까, 혹은 더 인간다운 공동체로 회귀해 나갈까? 분명한 사실은, 세계는 자기 생존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현 질서를 개편해 나가리라는 것이다.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간’ 예수의 파스카에는 한 인간이 맞닥트린 절체절명의 물음이 있고, 그 ‘건너는’ 과정에는 온 인류를 사지로 몰아넣는 미증유의 사태도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70억 인구의 숫자만큼 다양하지만 파스카는 이 모든 물음의 끝에서 시작된다. 파스카의 이행이 종교적인지, 개인 혹은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절박함에는 절박함으로 이끈 수많은 환경적 요인이 존재한다. 양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끔찍했던 악몽이 불과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개인과 인류에 가하는 숱한 린치들, 테러와 내전, 패권 전이 있었고, 이제는 기후위기에 팬데믹까지 덮쳐 속수무책이다. 아무도 일개 바이러스 따위(?)가 이런 정도의 파급력을 보이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여전히 치명적 타격을 입는 빈곤 계층과 그들 현장에서 ‘파스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빈 무덤(이미지 출처 = Pixabay)

처음 이스라엘의 대탈출(파스카)도 이집트의 착취로 인한 절규의 끝에서 시작되었다. 막간 곳까지 간 이스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도 그들을 돕지 않았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고립무원이었으며, 다만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만이 남아있었다. 하느님의 개입은 이때 이루어졌다. 고대 이스라엘을 이끈 신은 물리적 억압과 착취로 빼앗긴 들에 봄의 기운을 불어넣는 신으로 등장했다. 해방은 이스라엘이 되찾은 들판에서 잃어버린 자유와 희망을 온몸으로 기뻐하는 축제로 분출됐다. 이것이 ‘파스카’ 축제의 기원이다. 축제의 중심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이루어낸 해방의 기억, 죽음에서 삶으로 가로지른 승리의 기억을 경축함이다. 여기에 덧붙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주간 첫날, 목격된 예수의 빈 무덤엔 수많은 물음이 존재한다. 물음은 그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사실 여부에 있지 않다. 물음은 그동안 익숙하게 지내던 예수에게서 낯선 예수로 건너가는 ‘사이’ 어디쯤인가에 존재한다. 사실 빈 무덤을 목격한 이들이 보인 반응은 오늘 부활을 기뻐하고 환성을 올리는 교회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그들이 받았을 충격을 마주하기엔 우리의 빈 무덤은 아직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우린 지금껏 그들처럼 살아보질 못했다. 예수와 함께한 극적인 동행, 감탄과 놀라움, 찬사와 비난, 일상의 혼란과 격동을 거쳐 오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스승을 따르고, 불투명한 미래에 몸을 던지는 일도, 스승의 체포가 현실이 된 밤, 스승을 부정하고 배반한 자로서의 그 밤도 지새 보질 못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일은 손안에 들려있던 메시아의 미래가 산산조각이 난 일이다. 빈 무덤은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온 자가 목격한 현장이 되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그들의 ‘빈 무덤’이 실은 부활의 전조가 아니라 어둠 자체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제야 빈 무덤이 가하는 물음이 실은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를, 현재의 시간을 송두리째 뒤엎는 가혹한 물음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빈 무덤은 예수에 대해 걸었던 기대와 환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자신들이 애착했던 예수는 원래 없던 존재였다. 그런 게 ‘있다’고 여겼던 것이 실제는 없는 환상이었음을 알려준 사건이다. 그들이(혹은 우리가) 꿈꾸는 혁명과 변화는 실패로 끝났다는 표지다. 그러니 실패는 추종자들의 것이지 예수의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건너가지 않은 파스카는 파스카가 아닌 것이다. 부활 성야에 울려 퍼지는 장엄 찬가는 인류의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 빛으로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의 위엄 서린 노래다. 교회는 죽음의 문턱에서 새벽의 여명을 뚫고 나오는 그의 승리를 감동적으로 노래한다. 이 노래는 차별과 배제로 살아온 이들의 눈물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자들의 노래다. 이 밤, 교회는 아주 오래전에 파라오와 한판 대결을 벌였던 이스라엘의 신을 기억해 내고 다시 허리띠를 동여맨다. 부활 성야는 그런 밤이다.

21세기 교회가 감행하는 파스카는 어디로 ‘이행’하고 있는가? 오늘 이 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는가? 정작 교회가 해야 할 파스카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둘렀던 자기 신의 아우라를 벗어내는 일, 어떤 신적 특권도 주장하지 않았던 예수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이 아닌가? 갇힌 물에 길을 내고, 장벽을 허물며 전진해 나가는 거기서, 그때 비로소 교회라면, 교회는 자신을 ‘고정’하는 어떤 작업도, 시도도 견딜 수 없어야 한다. 교회는 어떤 파괴적 체제와도 타협해서는 안 되며, 거절하고 또 거절해야 한다. 그렇게 순응하면서 교회일 수는 없는 것이다. 빼앗긴 하늘과 들, 숲, 계곡, 광장으로 죽은 듯이 사라졌던 뭇 생명이 돌아오게 하라. 그들이 돌아와 싱싱하게 날갯짓 하게 하라. 얼어붙은 세상에 봄이 오게 하고, 한 판 축제를 벌이게 하라. 이것이 파스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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