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코로나 바이러스와 인권정치 1]

일주일 전 여행 중에 비행기를 탔다. 옆자리에 백인 청년이 앉았다. 우리를 보더니 흠칫 놀라더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말했더니 쭈뼛거렸다. 일반적으로 남미 사람들은 한국을 잘 모른다. 주저주저하더니 “코로나....”라고 말한다. 일행 중 한 명이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뭔지 모르지만 안심하는 듯했다. 물론 여행하는 내내 힐끗힐끗 우리 쪽을 보았지만 말이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이 말이 지금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말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국에 대한 혐오,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인정하고, 용인한다. 중국인을 혐오하는 것은 정당하니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 사태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으니 그들은 비난받고 격리되고 배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중국인을 발가벗겨 넘기는 말이다. 이 말 속의 중국인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타인의 처분에 맡겨진 존재가 된다. 이를 ‘발가벗은 생명’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는 나는 아니니까 나에 대해서는 부당한 공격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알아듣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 나를 중국인과 분별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그들이 애초에 나를 중국인과 구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을 구분하는 사람이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그 권리가 박탈되어 마음대로 처분해도 되는 존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그러면 다시 구차하게 설명한다. “두 유 노 삼성?” “두 유 노 엘지?” 그리고 “두 유 노 비티에스?”

구차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 대부분 구별한다. 그런데 그 분별은 정말 분별일까? 비행기에서 우리 일행에게 “코로나?”를 물어본 다음부터 우리 일행은 비행기 타는 내내 기침과 재치기를 조심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콜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다시 불안한 듯이 쳐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기침, 재채기와 함께 우리가 이전에 한 모든 “두 유 노우....”는 허사가 된다. 그래, 니네가 중국이 아닌 한국이라고는 했지. 하지만 너네 같잖아.

기침과 함께 분별은 의미 없는 것으로 무화된다. 답답하지만 이럴 때도 역시 구별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탓하는 게 아니다. 분노와 짜증은 굳이 구별하게 해 달라고 말하게 만든 중국과 중국인을 향한다. “이 미개하고 무식한 것들은 왜 그런 짓을 해서 병을 만들고 퍼트려서....”가 된다. 서구인이 아시아인을 구분하지 못할수록,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수록 분노는 중국인을 향해 다시 표출된다. 그리고 더 크게 대답한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2월 4일, 중국에서 일어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가 2만 명이 육박했다. (사진 출처 = KBS News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한국뿐만 아니다. 일본인도 그렇게 말한다. ‘심지어’ 홍콩인도, 타이완인도 그렇게 말한다. “중국인은 맞습니다만 저는 홍콩 사람입니다.” 억울함이 반이고 두려움이 반이다. 내가 저 미개하고 무례한 중국인으로 분류되는 게 억울하고, 그 중국인으로 분류되어 겪게 될 차별과 배제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의 목소리가 커지고 행동이 공격적이면 공격적일수록 외친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이 말이 저들에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다. 저들이 이 말에 응답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부질없다. 말이란 분별하기 위해 쓴다. 분별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말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국인이 아니에요.”를 외치는 우리에게는 분별이 필요하지만, 이 말을 듣는 저들에겐 분별의 이유가 없다. 분별의 가치가 없다. 애초에 저들에게 중국인과 한국인은 구분 가능한, 구분할 필요가 없는 한 덩어리의 사람들일 뿐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는 더욱더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구분해서 바라보는 것이 어떤 유효함도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어권에서 사용하는 ‘치노’라는 말은 그때에도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시아인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진 지금도 구분할 필요가 없다. 구분하지 않아 그들에게 억울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간절히 분별해 주기를 바라는 우리 비-중국 아시아인들과, 그걸 구분할 필요가 없는 서구인들 사이의 간극, 그 간극에서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이들은 중국을 주저앉히기 위해서 대중들 사이에 격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이 반중국/반아시아 정서에 기름을 붓고자 한다. 이들의 중국 비판은 결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의 종식이 목적이 아니다. 중국을 주저앉히고 현 미국-유럽 우월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그동안 세계의 위협이 되어 온 중국에 대한 이중적 평가를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이다.

첫 번째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동안의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성장에서 이들이 느낀 위험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상징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 세계의 안전, 그리고 서구의 우월적 지배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서의 중국이다. 역시 중국은 위험하다. 지금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전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위협적인 중국이 사실은 부실공사에 불과하며 아무리 잘난 척을 해 봤자 미개한 후진국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러니 중국은 더 위험해진다. 이 부실하고 미개한 나라가 쓸데없이 경제력과 군사력만 강하니 진짜 위험하다. 그러니 주저앉혀야 한다.

애초에 저들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위생적’인 중국도, ‘문화적’인 중국도 아니다. 중국을 자신들의 아래로 주저앉히는 것이다. 중국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랬고 1970년대 일본의 경제적 급성장 이후 프라자합의 때도 그랬다. 이들은 서구가 아닌 것들이 서구와 대등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들에게 비서구는 언제나 재앙의 근원지일 뿐이다. 영원히 미개한.

그러니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이 말은 비-중국 아시아인을 안전하게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애초에 애써 중국인과 중국인이 아닌 아시아인을 구분하는 에너지를 써서 자신을 안전하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에너지 낭비다. 한 덩어리로 묶어서 혐오하고 격리하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아무리 그 앞에서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라고 말해 봤자 그 말이 우리를 안전하게 할 리가 없다.

거기서 우리가 당할 것은 비웃음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야 할 인종주의자라는 평가를 우리가 대신 받을 뿐이다. 중국인은 미개하고, 중국인을 미개하다는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로서 미개할 뿐이다. 이 ‘미개한 자’와, 미개한 자를 미개하게 차별하는 미개한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세계의 질서를 지킬 사람은 이 모든 미개함을 미개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들뿐이다. 중국인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할 필요조차 없는 그들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당신들만 문명인입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매우 슬프게도.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단속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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