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철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 오신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아기로 말을 건네신 사건인 육화와 성탄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바로 ‘공현(公顯, 에피파니아)’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공현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는 아기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아주 대조적인 방식으로 응답하는데, 공자의 표현을 빌리면 군자와 소인의 방식이라고 하겠다.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논어", 55장)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 “누구든 의로움을 추구하면 군자이고 사사로운 자기 이익에 탐닉하면 소인”이라는 뜻이다. 의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의로움을 찾으려고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한 줄기 별빛을 발견하게 된다. 이 별빛이 가리키는 것이 의로움이다. 우리가 정신없이 사느라, 삶의 무게 때문에 이 별빛을 보지 못할 뿐이다. 이 별빛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다.

우리는 이 별빛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우리는 그 별빛을 반기고, 그 별빛이 가리키는 대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별빛을 부담스러워하며 외면하며 살 수도 있다. 이 차이는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별빛이 가리키는 것에 응답하려면, 삶의 중심을 자신의 바깥에 두어야 한다. 삶의 중심을 자기 안에 두면, 별빛이 가리키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진다. 의로움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걸림돌이 된다.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이 갈린다.

삶의 중심을 자기 밖에 두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첫째,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삶은 철저히 자기 밖에 중심을 두는 삶이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중심이 밖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까닭이다. 둘째, 마리아다. 자신을 비우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었기 때문에, 처녀인 자기가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셋째, 예수다. 예수는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의 삶을 채웠다. 십자가 사건은 자기 비움의 절정이다. 넷째, 동방의 박사들이다. 이들은 별빛을 보고, 자신의 익숙한 삶을 떠나 먼 길을 떠나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했다. 이 모두가 삶의 중심이 자기 밖에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헤로데는 삶의 중심을 자기 안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헤로데는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메시아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이권에 방해가 되면, 어느 누구든 제거하려는 권력자의 표상이다. 그는 삶의 중심이 철저히 자기 안에 두고 살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다시 인도로 원정투쟁을 떠났다. ⓒ정현진 기자

박사들은 경배를 마친 뒤 돌아갈 때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헤로데의 지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꿈에 나타난 하느님의 지시를 따를 것인가? 세상의 권력자의 뜻을 따라, 아기의 소재를 알려 주고 거기에 따를 보상을 챙길 것인가, 현실의 권력과 거리가 먼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의로움인가, 이익인가? 결국 그들은 하느님 뜻에 따라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을 따랐을 때 얻게 되는 이득을 포기한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의 권력을 거부했을 때 닥칠 손해와 위험마저도 감수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삶의 중심을 철저히 자기 밖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헤로데와 동방박사의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의 별빛을 볼 수 있다.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다. 의로움을 앞에 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첫째, 우리는 헤로데처럼 삶의 중심을 자기 안에 두는 소인의 길을 택할 수 있다. 별빛을 외면하는 것이다.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 알지만, 내 자신의 이권이 언제나 우선이다.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못 본 체하거나 그럴 듯한 변명으로 자신을 합리화한다. 진리보다 현실의 힘을 추종한다. 의로움은 잇속에 휘둘린다.

둘째,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삶의 중심을 자기 바깥에 두는 군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 마음 깊은 곳의 별빛을 따라 사는 것이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의로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동방박사의 경우처럼, 불이익과 위험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지 모른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힘, 의로움과 불의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군자의 삶이냐, 소인의 삶이냐, 선택해야 한다. 중간은 불가능하다.

정권이 변했지만, 세상은 아직 많이 변하지 않았다. 신고리 공론화, 다시 굴뚝으로 올라간 비정규 노동자들, 다시 인도로 원정투쟁을 떠난 쌍용차 노동자들, 되살아난 설악산 케이블카, 지지부진한 4대강 재자연화 등은 오늘 우리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잘 바뀌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의 이익이라도 챙기려는 유혹, 익숙한 것에 머물려는 유혹은 더 강렬해진다. 삶의 중심을 자기 안에만 두려는 유혹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아기가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박하게 요청하고 계신다, 의로움을 따르라고, 진리의 편에 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매력적인 것, 어떤 부와 권력과 명예도 거부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소인의 길을 버리고 군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이다. 새해의 다짐이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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