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3월 17일(사순 제2주일) 창세 15,5-12.17-18; 필리 3,17-4,1; 루카 9,28ㄴ-36

사순시기는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시기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장면은 부활로 가는 길에 있어 절정인 것같이 보인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탈출

'주님의 변모'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루카의 복음 구절의 배경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의 배경과 똑같다. 바오로에 따르면,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갈라 2,9)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반한다.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가 그들이다.(루카 9,28)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루카는 그들이 예수님의 “떠남”에 관하여, 바야흐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려는 그분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고 전해 준다.(9,31) 루카는 예수님의 떠남을 표현하기 위하여 의미심장하게 “탈출”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의 의미는 풍부하다; 그것은 생명으로, 부활로 가게 해 주는 떠남이다. 이 탈출은 파스카, 과월이다. 하느님나라의 징표인 약속된 땅으로 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탈출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계획에서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것은 그분의 제자들과 우리들의 희망을 계속 유지시켜 주어야 할 확신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들은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을 에워싸고 있는 생명의 하느님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는 또한 우리에게 탈출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 충만한 친교 속에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떠남이기 때문이다. 이 탈출은 고통스럽고 피할 수 없는 측면들을 가져올 것이므로, 베드로는 그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 매료되어 도피하고 싶은 것이다.(루카 9,33)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다

베드로는 잘못 알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중단할 수 없다. 우리는 천막 안에 도피처를 찾아서는 안 된다.(루카 9,33) 창세기의 말씀도 탈출을 다루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알고 있는 안전한 세계를 떠나라고 요구한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믿음은 그로 하여금 모험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떠난다. 하느님은 그가 셀 수 없이 수많은 후손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고(창세 15,5)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실 땅에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15,18)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라는 뜻은 지상에서 매일 우리가 행동하는 바에 대한 궁극적인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의 친구들을 비난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증언과 그의 증언과 일치하여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필리 3,17-18) 이처럼, 바오로는 그들에게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라”고 요구하고 있다.(4,1)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역사의 굴곡과 어려움 한가운데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느님나라의 선물을 환영하면서 하늘의 시민,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나라의 시민들이 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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