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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적들과 친구되기[구티에레스 신부] 2월 24일(연중 제7주일) 루카 6,27-38

이번 주일 루카 복음 역시 평지설교에 속한다. 루카의 참행복들은 역사의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을 보여 준다. 이 거룩한 사랑은 오늘의 복음 구절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의 뿌리다. 예수님은 그분 앞에 모여 있는 군중에게,(루카 6,17.27) 아버지 하느님처럼 이기심을 버리고 사랑하라는 초대를 한다.

그분은 가장 어렵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우리의 적들을 사랑하는 문제다.(6,27.35)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다. 이 적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 전에 우리의 친구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적을 사랑하는 과정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 방향이다.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은 불쾌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복음은 적들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있다.(왜냐하면 적들을 만들지 않는 길은 단지 불의에 대해 아무 말하지 않는 것으로도 쉽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요구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와의 불일치에도 그들을 우리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친구로 삼는 일이다.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길이다.(6,28) 그것은 실제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에 의해 질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원수 사랑. (이미지 출처 = Pxhere)

다윗처럼

이 요구하는 사랑은 반드시 행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공격에 부적절하게 응답하지 않고, 우리에게 속한 것을,(루카 6,29) 우리에게 필요한 것까지도 주는(6,30) 행동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길 속에서 황금률이 발견된다. 그것은 하느님처럼 자비로워지는 것이다.(6,36) 하느님의 사랑은 오직 응답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은 국가 혹은 인종의 울타리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은혜를 모르는 무심함과 우리의 죄라는 장애물까지도 초월한다.(6,35) 용서란 약하고 회의적인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용서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무엘의 풍요로운 이야기에 나타난다. 사울로부터 맹렬하고도 부당하게 박해를 받는 다윗은 그의 적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에 그를 살려 준다.(1사무 16장)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은 그의 도덕적인 힘을 보여 준다. 그는 젊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약할 수도 있지만, 그의 영혼에 “하늘에 속한 사람”(1코린 15,48)의 강철의 옷을 입혔다. 다시 말하자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행동을 자기 행동의 모범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오직 영적으로 강한 사람들만이,(15,45) 교의주의 없이 그들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이, 적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여 생명을 줄 수 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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