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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행복선언[강신숙 수녀] 2월 17일(연중 제6주일) 예레 17,5-8; 1코린 15,12.16-20; 루카 6,17.20-26

예수의 ‘행복선언’은 실패한 선언인가? 그는 인간이 겪는 가장 불행한 지점을 들고 와서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선언한다. 누가 예수를 선듯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장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는 지구상에 이런 예수를 믿는다고 따라나선 ‘그리스도교도’들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받아들이고, 믿고, 섬길 수 있었을까? 그들은 복음서 앞에 나오는 이 행복선언을 어떻게 알아들은 걸까? 사실 ‘예수’를 이해하기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진실은 ‘그리스도교도’들이다. 잠시 역사를 훑어봐도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이 지구상에 끼친 해악은 실로 엄청나다. 이렇게 단순 진리로 분류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대부분의 전쟁광들은 기독교도(국가)들이 아닌가? 이슬람인?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의 전쟁광들이 극우 그리스도교 세력들이라는 것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막강한 재력과 권력으로 무기 시장과 국가권력을 쥐락펴락한다. 물론 딱히 이들 때문에 예수의 ‘행복선언’을 실패한 선언으로 규정짓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예수의 ‘행복선언’은 ‘보통의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선언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이라면 예수가 선언한 ‘행복’을 환영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행복선언’을 듣는 순간 분노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이 ‘선언’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 선언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렇다. 남미의 가난한 이들은 역사를 통해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루카 6,20)고 한 말씀이 자신들을 망가트렸음을 뼛속 깊이 기억한다. 이 선언이 자신들과 후손을 대대로 몰락시키고, 수탈해 간 주범이었음을 잊지 못한다. 그리스도교도(침입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로 원주민들을 회유했다. “지금은 헐벗고 굶주림 때문에 고통스럽겠지만 저 천국에서 모든 것을 누릴 것이다. 그러니 저 천국이 답이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자행됐던 대규모 살육과 강제 세례, 영혼을 갈취한 문화적 식민화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21세기라 해서 달라졌을까? 백인에 그리스도교도들이며 부유한 그들은 여전히 세계를 식민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완덕’을 지향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시작했던 일은 가난해지는 일이었다. 일부 재산이 많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고 나서야 예수를 따랐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현실 세계를 역행하는 일이었고, 이런 행위는 어려서부터 주입받은 행복과 안정, 명예를 배반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세상의 눈에 삐딱한 자들, 모자라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은 이들을 미쳤다고 낙인 찍었고, 이들은 기꺼이 그 미친 짓에 합류했다. 이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했고, 다른 무수한 성인들도 그러했다. 이들이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행동은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명령하고 주입했던 세계와 작별하는 것에서 예수의 길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행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상적이지 않다. 그렇다. 예수의 ‘행복선언’은 정상이 아니다. 예수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위반한다. 그는 비정상을 들고 와서 이것이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정상’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누가 감히 그 기준을 세우고 성역화했느냐고 반문한다. 정상성을 만든 자, 그것을 유지하는 자, 그것을 표준화하고 절대적 규범으로 만드는 자들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다. 예수의 행동은 정상적인 세계에서 버림받고 쫓겨났으며, 모욕과 중상을 당했다. 그러니 행복한 자는 바로 ‘실패한’ 예수 자신이다.(루카 6,22)

실패한 예수.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리스도교 제국주의자들은 예수의 ‘행복선언’을 읽지 않았거나, 건너뛰었거나, 문자 해독이 안 되었거나, 몰랐던 게 틀림없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이 가히 ‘혁명적’인 것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정상적 메커니즘을 모두 전복시키는 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 시야에 포착되지 않는다. 예수는 끊임없이 ‘비정상적인 자’들을 출몰시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아무리 그들을 추방하고, 없애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밟을수록 더 살아나 유령처럼 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예수는 그들을 ‘제자들’ 혹은 ‘예언자’라 불렀다. 그들이야말로 예수가 선언한 진정한 행복의 수혜자들이다. 그들만이 기뻐하고 뛰놀 수 있는 이유는 그래서다.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3)

예수는 우리의 탐닉(즐거움)에 딴지나 걸면서 고행과 극기의 성인이나 반기는 그런 가학적 인물이 아니다. 예수는 바리사이들의 비아냥처럼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한’ 인물이었다. 단지 예수의 비판은 진정한 행복을 막아선 자들의 위선에 있다. 그는 사제와 랍비,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중재자라는 온갖 이유를 들어 가엾은 이들의 ‘행복’을 가로채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행복은 동등하지 않았으며, 특정 계급에만 허용되었다. 누군가에겐 기쁨을 욕망할 권리조차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행복을 가로막는 자들의 최후가 어찌될 것인가를 만천하에 선포했다. “부유하고, 배부른 자들, 지금 웃는 자들은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4-26) 예수의 행복선언은 곧 인간 해방에 대한 선언이다. 모두는 어떤 처지에서든 자유롭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단, 누구도 타자를 자기 행복에 이용하거나 해하려 들어선 안 된다. 타자의 행복이 곧 ‘너(나)’의 행복인 까닭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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