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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영토’가 되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강신숙 수녀] 3월 17일(사순 제2주일) 창세 15,5-12,17-18; 필립 3,20-4,1; 루카 9,28ㄴ-36

아브라함이 처음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두고두고 의미심장하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1-4) 그리고 그는 그 긴 여정의 끝에 나타난 주님으로부터 오늘 첫 독서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된다. 아브람이 도달했던 ‘가나안 땅’은 이집트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엄청난 땅으로 확대되었다. 늙은 아브람에게 이런 크기는 감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대지였을 것이다. 그 땅이 그의 후손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니 실로 과분한 복이 아닐 수 없다.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후손“(창세 15,5)과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18절) 아브라함의 영토 사건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지금의 중동인들에겐 목숨을 걸고 지켜 나가야 할 땅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적자라고 주장한다. 자신들 외에 아무도 이 거룩한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며 ‘피의 맹세’를 한다. 가끔씩 이스라엘과 결부된 중동사태를 볼 때마다 아브라함이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뭐라 할지 궁금해지곤 한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시고”(창세 15,6) 땅과 후손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자에게 내린 축복이다. 그는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이미 (소유 대상의) 대지를 떠난 이방인이 되었다. 고정된 영토를 떠난 자, 영토를 소유할 수 없는 자로서 ‘영토’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 축복의 토대는 모두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한다. 믿음은 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네, 없네’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믿음은 열린 공백, 해방의 공간이며, 정의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자가 취하는 태도다. 아브라함의 땅은 내딛는 자에게 내린 ‘꼴 없는’ 땅이어서 소유를 주장할 수도 소유될 수도 없다. 

하느님이 그것을 눈으로 보이는 표징으로 약속하는데 이 역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상징적 사건으로 나타난다. 불과 화염으로 나타난 신의 모습은 가늠할 수 없다. 그가 바치라 한 쪼개진 짐승도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 있다. 하느님의 약속은 이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신과 인간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는 인간이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며, 인간이 정의 내리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거부한다. 우리가 바라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캄캄한 ‘무’일 뿐이다.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12절) 땅과 후손의 약속은 이때 내려졌다. 놀랍게도 이 아브라함의 신은 모세와 엘리야에게도 같은 모양으로 내려온 신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사건을 계승하고 그 사건을 더 멀리 초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예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별과 같이 많겠다는 하느님의 약속. (이미지 출처 = Pixabay)

아브라함의 후손과 영토에 대한 사건은 예수에게 와서 예수 자신의 사건이 되었다. 오늘 ‘거룩한 변모’ 사건은 하느님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사건이며, 동시에 그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에 관한 사건이다. 이제 하느님은 혈통주의를 내치고 새로운 후손으로 ‘제자’들을 선택할 것이다. 예수가 가르친 모든 것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이 새 하늘, 새 땅의 주역이 될 것이다. 이들 역시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고, 완전히 다른 비전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과 성역화에서 오는 피비린내 나는 지하드(성전, 聖戰)는 사라질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파트너로 아브라함을 선택했듯이 예수는 제자들을 지목하고 선택할 것이다. 제자들의 이름 역시 시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아브라함은 수많은 유딧, 한나, 마리아, 베드로, 막달라의 마리아, 사마리아와 시돈의 여인들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쪼개어 받아낸 ‘후손과 영토’의 약속은 자신을 쪼갠 예수로 올려질 것이며, 그의 뒤를 좇는 무수한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는 변모의 현장에서 드러난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분명해질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신세계로 비쳐진, 얼마든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끌어 담을 수 있었던, 당대의 제국 문명과 권력에 맞선 자들이다. 하찮은 노예들의 무리를 이끌고 해방을 감행했던 모세나 아합과 이제벨의 거짓 제사장들과 한판 승부를 벌였던 엘리야의 타는 열정은 모두 예수에게서 한 빛으로 분출할 것이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 신비는 아름다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은 불과 연기로 나타난 신의 위용에 떨겠지만, 제자들은 눈부신 빛과 구름에 휩싸인 예수에 압도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신적 원천(땅, 율법, 혈통)을 자신의 소유인 양 주장할 때, 예수는 베드로의 ‘초막 셋’을 거부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하늘과 땅으로 신을 끌고 와 거기에 가두고 경배할 때, 예수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빈 공백’(필립 2,7-8)이 될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러했듯 예수의 수난과 죽음 사건은 그 자체를 고정하고 숭배하라고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의 자리엔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리엔 제 스스로가 될 수 없는 자들, 이름 없는 자들(마태 25,35-36)로 채워져 있다. “가난한 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 억압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일”(루카 4,18)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가 “선택된 아들”이 될 수 있었던 이유고, 우리가 “그의 말을 들어야”(9,35) 하는 이유며, 교회가 세상에 현존하는 이유다. 그러니 이제 제자들의 대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교회는 다시 예수의 길을 고정시키고 ‘영토’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이곳이 ‘우리의 영역’이라고 깃발을 꼽는 순간, 그곳은 우상의 신전, 우상들의 땅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불과 연기’로 나타났을까? 왜 예수와 모세, 엘리야는 산 정상에서 베드로의 ‘초막 셋’을 거부했을까? 이천년 교회는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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