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1월 20일(연중 제2주일) 이사 62,1-5; 1코린 12,4-11; 요한 2,1-11

1월도 어느새 중반이 지났다. 새해에 세운 계획은 모두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예수의 세례 축일’로서 화려했던 성탄시기는 막을 내리고 이제 ‘연중시기’로 들어섰다. 예수의 첫 공적 행보를 알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래서 더 절묘하고 멋지다. 그가 세운 계획의 첫 출발지가 ‘혼인 잔치’라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그가 품고 있는 속내,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아서다. 혼인은 두 사람의 결합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혼인 잔치는 가족과 마을, 사회의 경사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축제다.(물론 여기서 혼인은 ‘혼인제도’와는 별개다) 예수의 카나 혼인 잔치의 방문은 기쁨에 대한 근원적 복구이자, 새로운 창조다. 카나의 혼인 잔치가 가져온 기쁨은 새로운 포도주, 새로운 사람들로 흥겨울 것이고, 그 축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사야서는 이 기쁨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그러나 이 신랑은 어떤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는가? 이사야서는 그 여인이 ‘의로움으로 빛나는’(1-2절) 여인이라고 알려 준다. 신랑은 자기 연인과 혼인을 맺기 전까지 “잠잠할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1절) 그는 자신의 여인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떤 위험이나 난관도 불사할 것이다. 두 연인을 가로막는 장벽은 ‘불의’, 두 연인의 결합을 방해하고 떼어 놓으려는 온갖 협잡들, 그 어떤 것도 신부에 대한 신랑의 사랑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신랑은 무심할 수 없다. 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구할 것이다. 여인이 불의의 진흙탕에서 발을 빼는 그날까지 그의 모든 ‘구애’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새로운 이름’으로, 연인의 손에 사로잡힌 화려한 왕관으로 빛날 ‘그 때’까지.(2-3절) 잔치가 시작되는 날, 이제 그들 사이에 이별이나 ‘버림받는’ 일은 다시 없으리라. 신랑은 자신에게 상처 낸 여인의 과거가 무엇이든 그녀를 온전한 기쁨으로 맞이할 것이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4절)이기 때문이다.

‘그 때’가 도래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 ‘그 때’가 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축제의 중심에 ‘마리아’가 있다. 그녀는 이제 예수로부터 ‘여인’으로, 예수의 공적 임무를 함께 수행할 파트너로 드러날 것이다. 이들은 함께 ‘시온과 예루살렘’이, 대지의 모든 이가 혼인 잔치의 ‘신부’가 되도록 이 임무를 이끌 것이다. 이 새로운 시작의 출발선에, 예수를 공적 현장으로 이끌어 낸 마리아의 깊은 통찰력과 굳건한 신뢰, 주도적 역할이 놀라울 만큼 임팩트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모두가 분주해 할 때, 저마다 이유를 대고 자기 역할에 정신이 팔렸을 때, 잔치를 주목하고 있던 기민한 관찰자였다. 그녀가 예수께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하고 간청을 드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나 혼인 잔치. (이미지 출처 = Pixabay)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거절하겠지만, 마리아가 취한 태도는 단호하다. 그녀는 흔들림 없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할 것이다. 물론 예수의 말이 맞았을 수 있다. 아직 예수의 ‘때’가 오지 않았을 수도, 혹은 예수조차 그 ‘때’를 모르고 있거나, 망설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예수를 밀어내고 도전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중재자, 현실적 관상가요 행동하는 신비가, 바다의 별.... 무엇을 칭하든 그 이상이다. 그녀는 마침내 ‘하느님의 때’를 ‘바로 지금 여기’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며, 예수를 중심에 세우고, ‘아버지의 뜻’을 도래케 한 가장 아름다운 동행자인 것이다.

예수는 ‘정결례에 쓰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물을 ‘새 포도주’로 변화시킨다. 물로 닦아서 인간을 정결케 하던 낡은 법은 폐지되었다. 새로운 인간의 등장,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을 알리는 새 포도주가 예수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동시에 새로운 포도주이기도 하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일을 완성할 것이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그가 일으키는 새로운 사람들은 모두 그의 포도주(성혈)로 인해 ‘의롭게’ 될 것이다. 예수의 세계는 이렇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일상에서, 매일 거듭되는 반복 속에서,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뻔한 세상의 루트 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졌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옛 물독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주’가 퍼올려지고 있었다. 세상은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새로울 것 없는 하루라고 심드렁하겠지만 그런 식탁 위에도 ‘포도주’는 배달되고 있었다. 세상은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예수의 ‘카나 혼인 잔치’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와 마리아는 나란히, 그리고 함께 ‘변화시키는 주체’이자 ‘변화’ 자체가 되었다. 그들은 ‘길’을 가리키는 동시에 ‘길’이 되었으며, 하느님나라를 건설하는 동시에 하느님나라가 되었다. 그와 함께 물을 붓고, 포도주를 나르던 잔치의 일꾼들처럼 우리 역시 잔치의 주역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변화, 완전히 새로운 체제, 새로운 형식, 새로운 가치와 삶의 방식을 고민하며, 마리아처럼 예수에게 간청할 것이다. 그의 명령에 귀를 열고, 그가 ‘하라는 대로’ 따를 것이다. 이것이 교황 프란치스코가 언급한 소위 ‘마리아의 방식’이다. “마리아는 온유한 사랑의 혁명가로서, 겸손과 온유가 나약한 이들의 덕이 아니라 강한 이들의 덕이며, 자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거나, 다른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복음의 기쁨', 288항 참조) 방식으로 하느님나라를 끌어들였다.

올해는 더 주의 깊게 세상을,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바라볼 일이다. 더 뭔가(누군가)를 건드리고, 밀어내면서 그의 ‘때’를 앞당길 것이다. 더 많은 ‘아름다운 동행들’이 일어나 함께 기운을 나눠, ‘이깟 추위쯤’ 하고 넘길 일이다. 그런 한 해라면 얼마든 따뜻하게 취해 봄 직하다. 식탁에 포도주가 놓여 있다. ‘아직은’ 이라고 말하지 말라. ‘이미’ 잔치는 시작되었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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