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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 캐슬’의 예언자[강신숙 수녀] 2월 3일(연중 제4주일) 예레 1,4-5.17-19; 1코린 12,31-13,13; 루카 4,21-30

어느 신학자가 했다는 말이다. “다행히도 여러분들이 믿는 그런 하느님은 존재치 않습니다.” 열심히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상당히 불쾌하고 당혹스러울 것 같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하느님이 아닌 ‘무언가’를 섬긴다면 그것은 우상을 말함인가? 우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나자렛을 찾은 예수도 저 신학자가 한 말처럼 회당에 나와 있던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에 큰 기근이 들어 많은 과부와 나병환자가 곤경에 처해 있었지만, 하느님의 예언자는 시돈 지방 사렙다 과부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찾아가 가뭄과 역병을 몰아냈다.”(루카 4,25-27) 그러니 ‘당신들이 믿는 그런 하느님은 없는 것’이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예언자)은 소위 ‘재수 없는’ 사람들이니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의 소명”에 맞물린 예수의 운명을 가감 없이 비춰 준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타락과 위기 때마다 나타나 이스라엘에 살 길을 열어 준 하느님의 메신저들이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웃 나라의 번영(신)을 질투하고, 그 신들의 세계를 모방했으며, 틈만 나면 바알을 안방으로 끌어들였다. 하느님과 바알이 격돌하는 중심엔 어김없이 예언자들이 있었다. 우상은 하느님과 너무 흡사해서 그 진위조차 가리기 어려운데, 거기에 예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예수가 광야에서 겪은 유혹은 문명의 세계로 접어든 모든 인류가 겪게 될 보편적 문제였다. 악마는 단식으로 허기진 예수를 미끼로 그의 자의식, 그의 지위(하느님의 아들)를 건드린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부추기거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으니 영혼을 팔라고 한다.(루카 4,1-13) 예수의 이 일화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악마를 대적하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사실이다. 악마는 인간의 허점과 욕망을 파고들면서 환상을 심고, 끌고 다니다 종국엔 철저히 파괴하는 자다. 이들 세계에서 정직과 신실은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바벨탑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공동체와 사회가 어떤 식으로 가짜 신을 섬기고 유지하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 사례다. 최고의 탑을 쌓기 위한 인간 사회의 시스템을 리얼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SKY 캐슬'의 등장인물 김주영. (이미지 출처 = JTBC 홈페이지)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드라마 ‘SKY 캐슬’은 바벨탑의 전형적 사례다. 스카이 캐슬은 피라미드의 최고가 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인간의 욕망을 생생히 파헤친다. 최고의 명문대(SKY)는 피라미드 정점으로 가는 관문이다. 입시코디 김주영이 ‘예서 엄마’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 말은 가히 신적 위치에 선 자의 위용을 느끼게 한다. “어머니, 나만 믿으세요. 내가 예서를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녀는 SKY 캐슬의 교주로서, 대한민국 모든 ‘예서 엄마’들의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정점을 욕망하는 자들 곁에는 ‘코디 김주영’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김주영은 전능하지 않다. 그는 ‘욕망’에 기생하는 신, 욕망이 무너지면 함께 파멸하는 허접한 신에 불과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김주영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그녀의 ‘파괴력’을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그녀를 계속 신의 위치에 올려 놓는 사람들, 파괴 속으로 아이들의 등을 떠미는 광신도들이다. 바벨탑은 ‘신화’가 아니었다. ‘SKY 캐슬’을 욕망하는 한 누구도 바벨의 광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믿는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떠나 시돈과 시리아를 선택한 일 또한 얼마나 마땅하고 지당한 일인가. 화를 내고 격분할 일이 아닌 것이다. 대체 하느님이 누굴 버렸다고 이러는가?

예수 강생은 이런 우상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온 하느님의 사건이다. 그는 잘못된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자 고장 난 인간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온 하느님이다. 예수는 진짜처럼 모방하고 있는 가짜 신의 처소, ‘예루살렘의 성전’, 스카이 캐슬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공언한 예언자다. 예수의 해방, 희년의 선포를 들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러했듯이,(루카 4,18-21) 예수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가짜 신의 정체를 간파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되었으며,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아비(요한 8,44)”라고 단언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예수의 아버지는 ‘다행히 그들이 믿는 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는 성난 군중의 손에 이끌려 벼랑 끝까지 끌려가는 위기에 봉착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길을 막아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루카 4,28-30) 우상은 ‘욕망’이 없는 자에게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신이기 때문이다. 오늘 예레미야가 전하는 예언적 힘의 원천이 바로 그런 연유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계시고,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으며, 이것이 곧 진리라는 사실 말이다.

피라미드의 환상, 그 거대한 꿈이 무너지는 날, ‘예서’네 가족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고 해방이다. 이것이 하느님과 우상의 ‘차이’다. 해방과 속박은 사실 이렇듯 한 끗 차이처럼 보이나, 이 차이의 경계에 선다는 것은, 힘과 힘의 충돌 속에서 진실을 가려 낸다는 것은, 실로 위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겁낼 일은 아니다.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내가 너를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대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4-5.17-19)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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