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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1월 24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2019년 제53차 홍보 주일 교종 담화문

인터넷 시대의 명암과 효과적 활용법 제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터넷 사용이 상용화된 이래 교회는 늘 민족 간의 만남과 인류연대를 위한 활용법을 고심해 왔습니다. 이 담화를 통해 여러분이 ‘관계 안에 있는 존재’의 중요성과 그 바탕을 숙고하고 오늘날 방대한 커뮤니케이션 맥락의 어려움 속에서 홀로 고립되고 싶지 않다는 인간존재의 본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은 일상의 영역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보급돼 있습니다. ‘인터넷은 우리 시대 자원입니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지식과 관계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산과 유통, 콘텐츠의 사용과정과 관련해 기술이 가져다 준 중대한 변화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진짜’ 정보를 검색하고 공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위험요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 인터넷 공간에는 가짜정보가 난무하고 의도적으로 특정사실과 인간관계를 왜곡하는 등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에 노출돼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회 연결망’은 우리가 서로 더 가까워지고, 서로를 새롭게 발견하고,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 정치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개인과 권리에 대한 존중 없이 개인정보를 조작하는 행위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도 이해해야 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4명 중 1명은 사이버 폭력인 ‘사이버 불링’과 연관돼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터넷의 긍정적 잠재력을 재발견하기 위해 인터넷 기반인 ‘그물망’에 대한 비유를 숙고해야 합니다. ‘그물망’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중심이나 위계구조, 수직적 조직체계 없이 안정성을 보장하는 여러 개 선과 선들의 교차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네트워크’란 각 구성요소들이 책임을 나눠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그물망’의 비유는 ‘공동체’라는 또 다른 의미 있는 관념을 떠올립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화합을 이루고 서로를 지지하면서 신뢰감을 바탕으로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때 공동체는 더욱 강해집니다. 공동체가 ‘연대의 네트워크’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언어사용을 바탕으로 상호 경청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사회연결망 공동체가 의미하는 바는 ‘공동체’의 참된 의미와 같지 않습니다. 이 가상의 공동체들이 화합과 연대를 보여 주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공통의 취미나 관심사를 가진 유대가 약한 ‘개인들의 집단’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인터넷상에서는 자신이 속한 집단 밖의 사람 타인과의 대립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상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간의 차이점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규정해 의심을 야기하며, 민족적, 성적, 종교적 편견 등 온갖 편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성을 배척하는 집단, 디지털 환경 안에서 증오의 소용돌이를 조장하고 노골적 개인주의를 양산하는 집단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세계의 ‘창’이 돼야 할 인터넷이 개인의 나르시시즘을 전시하는 ‘쇼윈도’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타인과의 만남을 도모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거미줄(web)에 걸려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관계 차원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켜 ‘사회적 은둔자’로 전락하는 위험한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관계 영역에서 심각한 분열을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는 이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위험한 사회현실은 윤리적, 사회적, 법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다양한 의문을 제기할 뿐 아니라 교회에도 큰 도전입니다. 각국 정부가 인터넷을 규제하면서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안전한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본래의 비전을 지키기 위한 법적 장치를 구축할 동안 교회도 인터넷의 긍정적 용도를 장려할 책임이 있으며, 그런 노력에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상호이해 증진을 위해서는 연결망을 늘리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온라인상에서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서 진정한 공동체적 정체성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해답은 몸과 각 지체의 관계에 관한 세 번째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각 지체가 유기체로서 하나의 신체를 이룬다는 비유를 통해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에페 4,25) 서로의 지체가 되라는 심오한 동기부여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로 하여금 ‘거짓’을 벗어버리고 ‘진실’을 말하라고 촉구합니다. 진실을 지키는 의무는 친교의 상호적 관계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됩니다. 진실은 친교 안에 있습니다. 거짓은 우리 모두 하나의 몸에 속한 지체라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겠다는 이기적 거부로 다른 이들에게 나를 내어 주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발견할 유일한 방법을 잃게 됩니다. 몸과 지체의 비유는 친교와 ‘타자성, 다름’에 근거한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하나의 몸에 속하는 지체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우리가 서로를 잠재적 ‘경쟁자’로 보지 않도록 하며, 원수까지도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규명하기 위해 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배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선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타자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자성은 관계와 친밀함의 필수조건입니다. 인류에 존재하는 이해와 소통능력은 삼위일체 안의 세 위격 사이의 사랑의 친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고독’이 아니시며 ‘친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랑이시며, 소통이십니다. 참으로 사랑은 다른 이들과 만나기 위해 스스로를 소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소통하시고 당신을 전달하시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취하시어 역사 속에서 인류와의 진정한 대화를 이뤄 내셨습니다. 친교이시며 ‘자기소통’이신 하느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인간은 친교의 삶에 대한 갈망과 공동체에 소속되고자 하는 바람을 품고 살아갑니다. 성 바실리오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특징만큼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명확한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관계’에 더 치중하고 인류의 대인관계적 본성을 긍정하라고 요구합니다. 네트워크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특징짓는 친교의 증거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관계’며 ‘만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격려 아래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소통하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형상으로 표현되는 친교는 개인으로부터 인격적 특성을 구분해 줍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내가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참으로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사실 ‘사람’이라는 단어는 인간 존재를 얼굴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은 타인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 삶의 본질이 덜 개인적이고 더 인격중심적이 될수록 더 인간적이 됩니다. 이웃을 경쟁상대로 여기는 ‘개인’에서, 인생여정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인격적 존재’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참된 길을 발견합니다. 

몸과 지체의 비유는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상대방의 몸과 마음, 눈과 시선, 숨결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는 ‘실제 만남’을 보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만약 인터넷이 이러한 실제 만남의 도구로 기능한다면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친교의 ‘자원’으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정이 서로 더 가까워지고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기회를 늘리기 위해 인터넷을 활용한다면 인터넷은 하나의 자원으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인터넷을 통해 활동을 기획하고 성찬례를 거행한다면 인터넷은 자원으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고통의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고 그들이 함께 기도하고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발견하고자 함께 선을 찾아 나서게 된다면 인터넷은 자원으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진단’의 단계에서 ‘치료’의 단계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대화와 만남의 길을 열고 ‘미소’와 애틋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네트워크입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덫이 아니라 해방시키는 도구로, 자유로운 사람들의 친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네트워크입니다. 교회 또한 ‘친교의 성사’인 성체성사로 함께 엮인 네트워크입니다. 교회 안의 일치는 “좋아요” 버튼이 아닌 ‘진리’, 곧 “아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타인들을 받아들입니다.

바티칸에서 2019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학자 기념일에 프란치스코

 

 

“성 로메로 대주교처럼 불의와 가난에 반대하라”

교종, 파나마에서 중앙아메리카 주교단에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24일 파나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중앙아메리카 주교단을 만나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모범을 따라 교회는 거만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며 가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75년 전 파나마,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의 주교단으로 구성된 ‘중앙아메리카와 파나마 주교사무처’(SEDAC) 주교들에게 행한 교종의 연설은 교회 전체와 하느님 백성을 대상으로 한 연설이었다. SEDAC 의장 에스코바르 알라스 대주교는 인사말에서 폭력, 부패, 불평등, 이주문제를 비롯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소외로 두드러진 중앙아메리카의 슬픈 현실을 강조했다. 교종은 중앙아메리카의 소박하지만 시련을 거친 가난한 얼굴을 바라보며 비전을 넓히고 경청, 이해, 헌신, 책임을 다하는 일에 힘을 합치라고 격려했다. 교종은 1980년 3월 24일 ‘신앙에 대한 증오’로 피살됐다가 지난 10월 14일 시성된 산살바도르대교구장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모범이야말로 중앙아메리카의 자녀들이 보여 준 위대한 모범 중 하나라고 말했다. 연설 내용.

수많은 사람들, 사제, 남녀 수도자, 평신도들이 불의에 맞서 가난과 권력의 남용 앞에서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동정이 아닌 소명으로 자비의 활동을 위해 노력하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온 힘을 다 쏟으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교회와 주교들을 위한 영감의 영속적인 원천이 되었습니다. 저의 전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안토니오 콰라치노 추기경님은 로메로 대주교야말로 충실함에 있어 노벨상 후보였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주교처럼 로메로 대주교님도 여러 주교들의 사적 험담으로 의심을 받고 파문의 위기에 오르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혼란한 순간에도 그분은 충실한 삶을 특징짓는 나침반이었고 순교적인 헌신으로 생활했기에 봉사적 삶 안에 있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중앙아메리카 교회 DNA를 살아가는 예언자적 특징과 성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신앙 안에서 그를 탄생시켰던 분을 친밀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교회적 삶을 배우고 동조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친밀한 사랑 없이 그분의 역사와 회심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순교로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그를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거저 주어진 무상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생겨나는 사랑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를 소유자나 유일한 해석자라고 믿는 모든 유혹과 요구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교회는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고 우리와 함께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 없이도 앞으로 나갑니다. 순교란 무기력과 동의어가 아니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순교자는 은총의 보답을 육화시키고 삶으로 해석할 단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 로메로 대주교는 그를 신앙 안에서 탄생시켰던 어머니이신 교회를 사랑했고 자신을 교회의 지체요, 일부로 느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도권의 쇄신과 공헌을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바로 거기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분명한 손길을 발견했습니다. 이론가도 아니고 관념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공의회 문헌을 통달한 데서 나왔습니다.

이런 교회의 지평으로 빛을 받았기에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에게 있어 교회와 함께 느낀다는 것은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관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하느님 백성 앞에서 자신의 영감을 거부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찾고 만나기 위해 목자는 하느님 백성의 심장 고동소리를 듣고 배워야 하고 그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품기까지 사람들의 냄새를 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말씀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을 그 사람들을 통해 발견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동등하게 느끼고 바라보고 우리의 모든 사랑을 조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분법이나 거짓대립은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겸손하고 가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만한 교회, 자부심으로 가득 찬 교회, 자기만족으로만 그치는 교회는 ‘케노시스’(비움)의 교회가 아닙니다.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모든 사람의 삶 안에서 구원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우리의 상처이기도 한 그들의 상처를 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의 스타일로 행동해야 합니다. 목자는 자기 백성의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없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상처 입고 위협당하는 수많은 삶 앞에서 감동하는 능력으로 측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선동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요구와 소음을 들으면서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도 ‘소유’와 ‘취향’, ‘시간과 돈의 사용’, 기도하는 방식을 특징지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에 멈추어 선 신앙을 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쁜 경우 그리스도 없는 하느님, 교회 없는 그리스도, 하느님 백성 없는 교회라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유일한 기회는 바로 희망과 열망과 수많은 상처로 특징을 이룬 젊은이의 현실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세계청년의 날은 원주민들에 대한 관심과 아프리카 태생 국민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작된 것입니다. 청년들이야말로 우리가 공동체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알기 위한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본성상 어머니이고 교회발전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하며 그와 같은 어머니로서 생명을 낳고 기릅니다. 자유 안에서 자유를 위해 잉태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젊은이들과 동행하고 지지하며 그들이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교육과 프로그램을 증진시키도록 권고합니다. 제발 그들에게 허풍을 떨면서 마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그들의 불안과 상상을 빼앗고 이용하는 죽음의 문화가 되기 전에 길거리에서 그들의 마음을 훔치십시오. 수직적 관계나 가부장주의는 젊은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로서 형제로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아래로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 도달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삶을 담보로 하는 즉각적인 답변에 유혹되고 시급한 해결책 없이 극심한 갈등에 빠지는 상황에 있습니다. 가정폭력, 여성살해 등 우리 대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무장조직과 범죄조직, 마약밀매, 미성년자와 청년들의 성적착취 등 이런 상황의 바탕에는 대부분 비정상이 된 사회와 문화의 결과인 즉 어머니가 없는 고아의 경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를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많은 경우 가정은 사람과 공동선을 첫 자리에 두지 않으며 누구의 희생인지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계속 비대해지는 경제시스템, 심지어 낙원으로 여기는 그 경제 시스템에 의해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젊은이들도 가정의 따스함 없이, 가족 없이, 공동체 없이, 소속 없이 최고 사기꾼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미래는 여러분 민족의 문화가 존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문화를 활용하도록 노력하면서 현재를 존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문화적 자존감 내에서도 존엄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이든 부패를 퍼뜨리고 가난한 이들을 강탈하며 성장하는 거짓이익 앞에서 지역의 풍요로운 역사, 문화, 영적유산을 보호하면서 뿌리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많은 어려운 순간에 존엄성을 유지시키는 필수적인 생명의 특권을 앗아가기에 근본적인 빈곤을 낳는 여러분 민족의 영적 사막화에 반대하고 문화적 사막화를 거슬러 전력을 다하고 목소리를 높이십시오. 아울러 지난해 10월 주교 시노드 총회에서 강조된 것처럼 수많은 이주자들의 젊은 얼굴에 관해서도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보편성 덕분에 이주자들에게 형제적 환대를 제공할 수 있고 출발지와 도착지 공동체가 대화를 나누고 두려움과 차이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며 이주민을 위협하는 집단적 환상에 맞서 결속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환대하기, 보호하기, 증진하기, 통합하기’는 이주민 문제를 다루는 데 교회가 자신의 모성을 활용해야 하는 네 가지 동사입니다. 쓰고 버리는 세상의 정신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아니오’라고 거부합니다. 우리는 이를 용서와 회심을 통해 몸 자체로 계속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긴장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자문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머물고 싶은가?’ 사제들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근본적 책임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제들은 성직주의가 아닌 ‘부성(父性)’으로 표현되는 친근함과 이해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사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와 관계에서 항상 앞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사목자는 길을 알려 주기 위해 때로는 앞에 있어야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냄새를 맡기’ 위해 때로는 중간에 있어야 하고 아무도 버려지지 않도록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뒤에 있어야 합니다. 사제들은 ‘연민과 동정’의 중심을 잊지 않으면서 스스로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와 가톨릭 단체들, 가톨릭 홍보매체들 안에서 이교(離敎) 단죄 등으로 중심이 상실되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이것은 충고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씀 드리는 사항입니다. 빵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바쁜 일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오늘 한 사제의 요청을 들으면 적어도 내일 그를 다시 불러 이렇게 말해야 할 겁니다. ‘나를 찾았네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오늘까지 기다릴 수 있나요? 아니면 급한 일입니까?’ 그러면 그 사제는 그 순간 아버지 한 명을 얻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특별히 관리능력을 갖춘 구성원이 있더라도 사제들의 말을 경청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두려움보다 신뢰를, 위선보다 진심을, 일방적인 규율보다 솔직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의견교환을 가능하게 해 주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열린 문입니다.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말했던 것처럼 교회의 힘은 권력자들이나 정치가들의 지지에 기반을 두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참된 힘인 십자가의 팔로부터 지탱되어 걸어가기 위해 품위 있게 해방돼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표징으로 해석돼야 합니다. 이는 자원의 사용, 영향력과 지위의 활용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과 소유에 관해 양심성찰을 하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질문을 던집니다. 가난은 어머니이며 담벼락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자유와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약화시키는 타협으로 빠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멋진’ 것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교종, 세계청년대회 환영행사에서 ‘주님 사랑’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24일 제34차 세계청년대회 환영행사에 참석 꿈꾸고 사랑을 나누는 교회에 대한 비전을 젊은이들과 함께 나눴다. 환영행사는 새벽부터 시작됐다. 파나마 운하 위로 태양이 떠오르자 세계청년대회 순례자들은 화려한 깃발을 흔들고 노래하며 활기차게 행진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순례자들은 신타 코스테라의 2.5킬로미터 해안 순환도로를 행진했다. 이 길은 한쪽으로는 태평양, 다른 한쪽으로는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의 스카이라인을 면하고 있다. 순례자들은 이날 온종일 음악과 노래와 춤을 즐기며 활기찬 시간을 보냈다. 교종을 태운 백색 차량이 군중 사이를 지나 행사장에 도착할 무렵 참가자들은 모두 행진을 위한 워밍업을 마치고 출발 태세를 갖췄다. 차분하고 편안한 모습의 프란치스코 교종은 청년대회 대표단과 악수를 나누고 지역에서 제작한 영대를 선물로 받았다. 교종은 다문화공연을 관람하고 다양한 언어로 제공된 세계청년대회 수호성인들인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성 마르틴 포레스, 리마의 성녀 로사, 성 요한 보스코, 성 후안 디에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소개를 경청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종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연설 내용 요약.

베드로 사도와 교회는 여러분과 함께 걷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더 큰 행복과 여유를 가져다 주는 신선한 에너지와 분주함과 함께 앞으로 나가십시오. 우리는 화려한 청년축제를 통해 더 ‘재미있고’ 더 ‘멋진’ 교회를 만들려고 모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번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여러 순례자들이 감수해야만 했던 어려움들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자란 특정장소에 도착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길을 나서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계속 걸어 나가는 것이야 말로 큰 즐거움입니다. 만남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공동의 꿈을 보존하도록 초대하는 부르심입니다. 이 꿈은 모두를 위한 꿈이며,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꿈입니다.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은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 따라야 할 규범, 혹은 금지조항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지키신 그 꿈을 추구한다는 의미며,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압도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며, 모욕하거나 으스대지 않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일상적이고, 신중하고, 정중한 사랑이며, 자유롭고 또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며, 치유하고 높이 들어 올리는 사랑입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은 봉사하기 위해 뻗은 조용한 사랑의 손길이며, 스스로에게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는 헌신입니다. 이야말로 ‘의미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함께 외칩시다. “주님, 주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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