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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1월 16-17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기도하십시오”

 교종, 1월 16일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주님의 기도‘ 계속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16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접견에서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교육을 이어 갔다. 교종은 교리교육에서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아버지일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는 어머니와도 같으신 분이시라고 강조했다. 교리교육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교육을 이어 갑시다. 오늘 우리는 신약성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기도란 본질적으로 ‘아빠, 아버지’라는 오직 한 단어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교육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한 대목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또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라고 합니다. 복음의 모든 새로움을 응축하는 동일한 기원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마음속에서 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를 “아버지”로 부르면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 그대로 유지됩니다. “아빠(Abbà)” 신약성경에서 아람어 표현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아람어 단어들 안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기록된 것처럼 남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단어들은 예수님의 언어를 존중했습니다. 주님의 기도 첫 번째 단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기도의 근본적 새로움을 즉시 발견합니다. 이는 단순히 하느님 신비에 연결되는 상징, 즉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과 연결된 상징을 사용하는 문제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각자 마음 안에 쏟아 부어진 예수님의 온 세상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작업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빠”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단순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훨씬 친밀하고 감동적입니다. 누군가 원래 아람어인 “아빠(Abbà)”를 “빠빠(Papà)” 혹은 “밥보(Babbo)”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 “빠빠”나 “밥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우리 아버지”로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빠빠”라고 부르며 아이가 아버지에게 “빠빠” 혹은 “밥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느님과 관계를 갖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 표현들은 애정과 따뜻함을 불러일으키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 완전히 빠져들어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 어린아이 이미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이유로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기도를 잘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빠빠의, 밥보의 품 안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더 잘 소개해 주는 것은 복음서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루카 복음(15,11-32)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읽은 후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면 ‘주님의 기도’는 다채로운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렸으며 자신이 했던 서운한 말을 기억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포옹을 받은 후 방탕한 아들이 이 ‘주님의 기도’를 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면 그 말들이 어떻게 생명과 힘을 얻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스스로 물어봅시다. “하느님께서 오직 사랑만을 아신다는 게 가능한가?” “하느님은 증오를 모르시는가?” 하느님께서는 “나는 사랑만 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한 복수나 정의에 대한 주장 그리고 분노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랑만 알고 있단다.” 이 비유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음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특히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아무런 자격이 없는 경우에도 자식을 위해 변명하고, 감싸 안으며, 자식을 향한 공감을 멈추지 않으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기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아빠’라는 표현 하나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 이와 똑같은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 안에 다른 모든 나머지 기도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찾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모든 재능을 헛되게 낭비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안의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아버지일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는 어머니와도 같습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임신상태’ 속에 있는 셈입니다. 육체적 임신은 아홉 달이면 충분하지만 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순환을 만드는 영원한 임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란 그저 “아빠”, “빠빠”, “밥보”,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신뢰를 지닌 채로 말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버려진 느낌을 갖는 외로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실수하거나 죄책감에 빠져 불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의 애틋한 감성이 깃들인 “아빠”라고 부르는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감추지 않으십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아마도 누군가는 자신 안에 나쁜 것들을 가지고 해결방법을 모를 수 있으며, 이런저런 짓을 한 것에 대한 괴로움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얼굴을 숨기시지 않으시고 침묵하고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하고 말하십시오. 그분께서 대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렇긴 하지만 저는 죄인입니다.” 그럴지라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여러분을 잊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침묵 중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다”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그곳에 있었으며, 너와 가까이에 있었으며, 너를 향한 나의 사랑에 충실했단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이념이 아닌 성장시키는 생명”

교종, 1월 17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17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오만함이나 이데올로기와 타협을 가져올 수 있는 ‘완고한 마음’을 갖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핵심주제로 강론했다. 강론 내용.

“형제 여러분,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살아 계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완고하고 믿음이 없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이는 오늘 제1독서(히브 3,7-14)인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던진 강력한 ‘메시지’이자 경고입니다. 이 같은 경고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성원들 사제, 수녀, 주교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우리 모두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경고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면 제1독서에서 제시된 3개의 단어 ‘엄격함’, ‘완고함’, ‘유혹’을 살펴봐야 합니다. 엄격한 마음은 ‘닫힌’ 마음이며,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고 방어적 자세를 취하며, 닫아 버리는 마음입니다. 인생에서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자신을 향한 공격들이 몸을 경직시키게 만들기 때문에 ‘힘든 고통’이 일어납니다. 이런 일은 엠마우스의 제자들과 토마스 사도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런 나쁜 태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닫힌 사람’이고 닫힌 마음은 ‘엄격함’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의 마음은 굳어져 있는가? 닫혀 있는가?” “나는 내 마음이 성장하게 하는가? 성장을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항상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 성장합니다. 모두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바와 같이 그렇게 성장합니다. 우리는 넘어지면서 걷는 법을 익혔습니다. 기어 다니다가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성장합니다. 완고함은 마음을 닫는 것입니다. 누가 이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완고함은 그리스도인의 나쁜 태도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살아갈 용기가 부족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엄격함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완고함’입니다. 히브리서는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히브 3,13)라고 말합니다. 성 스테파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질 사람들을 향해 완고하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완고함이란 ‘영적인 고집’입니다. 완고한 마음은 ‘적대적’이고, ‘고집스러우며’, 자신의 생각 안에 갇혀 있고, 성령께 열려 있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는 이념적인 사람들의 프로필입니다. 즉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완고함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성령의 은총은 이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성장하게 하고 항상 앞으로 나가게 하며, 성령과 시대의 표징에로 마음을 열게 하는 생명입니다. 고집불통은 아프게 합니다. 마음이 닫혀 있고 굳은 사람들은 완고한 사람들입니다. 고집불통이고 완고한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념적인 사람들입니다. “나는 고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각자 생각해 봅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가?” “나는 대화할 능력이 있는가?” 완고한 사람들은 대화할 줄 모릅니다. 항상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지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단어는 ‘유혹’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들어가 지배하길 원하고 그렇게 할 줄 아는 ‘커다란 유혹자’는 신앙 없이 증오만 가지고 있는 ‘커다란 신학자’ 악마가 유발하는 죄의 유혹입니다. 따라서 완고한 마음은 자신이 유혹에 빠지도록 내버려 둡니다, 유혹은 그를 완고함으로, 닫힘과 다른 여러 가지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유혹이 왔을 때 우리는 회개하고 삶을 바꾸거나 혹은 타협을 시도합니다. 이쪽에 조금, 저쪽에 조금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네, 저는 주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 유혹도 조금 좋아합니다.” 이는 이중적인 그리스도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말을 인용해 봅시다. “여러분은 두 다리로 절뚝거립니다.” 한 다리가 아닌, 두 다리 모두 절뚝거립니다. 이는 타협의 삶입니다. “네,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주님을 따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미온적인 사람들은 항상 타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경우 그렇게 합니다. 타협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십계명과 성령의 식별로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실 때도 우리는 다른 것을 좋아하고 두 다리로 절뚝거리면서 두 개의 선로로 가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 누구도 완고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성령께서 저희를 밝혀 주소서. 굳은 마음은 여러분을 오만함으로 이끕니다. 오만한 마음은 당신을 반항으로, 이념으로 이끕니다. 유혹의 노예인, 유혹에 떨어진 마음은 여러분을 타협의 그리스도교로 이끕니다.

 

 

미성년자 성학대 방지 위한 바티칸 회의

2월 세계 주교회의 의장단 회의 세부사항 발표

 

바티칸 공보실은 1월 16일 오는 2월 21부터 24일까지 바티칸에서 열리는 ‘교회 내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전 세계 주교회의 의장단 회의 구체적 준비상황에 대해 공개했다. 이번 회의는 “교회 내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논의를 주제로 본회의, 실무회의, 공동기도, 피해자 증언청취, 참회예식, 폐막미사 등으로 구성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사흘 간 모든 회의에 참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변인 발표 내용.

올해 2월에 열리는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회의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이번 회의 목표는 참석 주교 전원이 ‘미성년자 성학대’라는 전 세계적인 문제를 예방하고 근절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히 이해하는 데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전 세계적 문제는 전 세계적 대응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교종께서는 이번 회의가 학술대회가 아닌 기도와 식별로 특징되는 교리적이고 실무적인 차원의 ‘사목자들의 회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종은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주교들이 회의를 마치고 각자 교구와 고국으로 돌아가 이 같은 사안을 다루게 됐을 때 적용해야 할 법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학대 방지와 피해자 보호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앞으로 어떤 사건도 은폐되거나 묻히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 언론의 과도한 관심과 기대가 쏠리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번 회의가 성학대 문제 근절을 위한 교회 행동의 시작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회의는 교회가 지난 15년에 걸쳐 끊임없이 단호하게 착수해 온 이 고통스러운 여정 가운데 한 단계일 뿐이다.

 

 

“교회는 생명의 휴머니즘을 강력히 제시해야”

교종, 바티칸 생명학술원 창립 25주년 서한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바티칸 생명학술원장 빈첸초 팔리아 대주교에 보낸 서한에서 오늘날 인간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종종 치명적 방식으로 유린된다고 경고했다. 교종은 낙태와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은 죽음의 반-문화 안으로 침몰시키는 아주 심각한 악이며 이를 막기 위한 형제적이고 결속된 휴머니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교종은 서한에서 생명학술원이 지난 25년 ‘창조와 인간생명’을 주제로 생명권 보호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치하하면서 안락사 반대와 생명보호를 위한 책임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한 교종은 서로 다른 계율을 넘어 문화 간 대화와 종교 간 대화에서 사용돼야 할 언어와 주제를 연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보편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판단기준을 탐구하는 데 중심적인 실마리가 되는 인간 기본권에 관한 성찰에 참여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교종은 나노 공학에서 로봇기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에 관한 성찰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면서 오늘날 인간의 육체도 그 반응방식까지 조종할 수 있는 ‘조작 허용’의 대상이 되고 갈수록 시장논리에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교종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가 민족들 사이에서 만들어 낸 형제애의 힘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영역이라고 강조하면서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알아볼 수 있었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자고 권고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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