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평화, 자유, 여성권리 가톨릭 이슬람 공동성명

프란치스코 교종과 이슬람 대이맘 역사적인 공동선언

 

프란치스코 교종과 알즈하르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는 2월4일 오후 아랍 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에서 “세계평화와 공존을 위한 인류 형제애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하나의 이정표이며, 국제사회에 주는 두 종교의 강력한 메시지이다. 선언문 내용 요약.

믿음은 신앙인이 다른 사람을 돌봐주고 사랑해야 하는 형제로 보도록 인도한다. 이 공동선언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서로를 일치시키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인류 형제애에 대한 믿음을 가슴에 간직할 것을 권유하는 진심과 진지함을 지닌 합리적 문서다. 모든 무고한 인간의 영혼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 고아와 과부들, 난민들과 망명자들, 전쟁의 모든 희생자들, 그리고 박해 받는 자들의 이름으로 인류를 권리와 의무와 존엄성으로 동일하게 창조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이는 것을 하느님이 금지하셨음을 확인한다. 알아즈하르의 대이맘은 가톨릭교회와 함께 대화 문화의 방식으로 공동협력을 행동방침으로 서로 간 이해의 방법과 기준으로 채택했음을 선언한다. 선언문을 통해 서로는 자신 스스로와 세상의 지도자들, 국제 정치지도자들과 국제경제 주역들에게 관용과 공존과 평화의 문화를 확산시키는데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 무고한 피 흘림을 멈추고 전쟁과 갈등과 환경파괴와 오늘날 세계가 처해 있는 문화적 도덕적 쇠퇴를 끝내는데 개입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두 종교 지도자들은 미디어 관계자뿐 아니라 종교인과 예술인들에게도 평화와 정의, 선과 아름다움, 인류 형제애와 공동 공존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확장시킬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현대세계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무감각해진 인간양심과 종교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 개인주의와 유물론적 철학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다. 또한 두 사람은 현대문명이 일궈낸 긍정적인 발전들을 인정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극단적이고 불가지론적 무신론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거나 넘어지게 하고 혹은 종교적 통합주의와 극단주의와 맹목적 근본주의로 빠지게 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국제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윤리의 악화 및 영적가치와 책임감의 약화를 우려했다. 그리고 종교적 국가적 극단주의와 불관용은 지역적, 단편적으로 치르고 있는 제3차 세계대전의 징후들을 양산했음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교종과 대이맘은 심각한 정치적위기, 불의, 소수 부자들에게만 치중되고 지구상 대다수 사람들은 혜택을 받지 못한 재화의 불공평한 분배가 많은 나라들이 피해를 보게 한 치명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수많은 병자와 궁핍한 이들과 목숨을 잃는 이들이 생겨나게 했고 지금도 계속 그런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확인했다. 또한 빈곤과 굶주림 때문에 이미 뼈만 앙상하게 남은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을 굶어죽게 만드는 이 위기 앞에서 용납할 수 없는 국제적인 침묵이 흐른다고 개탄했다. 두 지도자는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명백하며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이며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경향과 급진주의와 모든 맹목적인 형태와 극단주의에 대처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젊은이들 사이의 종교의식의 각성이 중요하다고 확인했다. 또한 두 지도자는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지키라고 선물하셨으며, 이는 누구도 없애거나 협박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조작할 권리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종학살 테러, 강제이주, 인신매매, 낙태, 안락사, 그리고 이 것을 지지하는 정책들과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시도들을 단죄한다. 또한 두 사람은 종교는 결코 전쟁을 선동하지 않으며, 증오와 적대감과 극단주의를 부추기지 않고 폭력이나 유혈사태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두 지도자는 이러한 불행들은 종교적 가르침에서의 이탈, 종교의 정치적 이용, 종교인 집단의 자의적 해석이기 때문에 “우리는 증오, 폭력, 극단주의 및 맹목적인 광신주의를 선동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과 살인 추방과 테러와 억압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라고 모두에게 요청하는 바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의 옹호를 받을 필요도 없으며, 당신의 이름이 사람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며 각자는 신앙과 생각과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누린다. 다원주의와 종교, 피부색, 성별, 인종, 언어의 다양성은 지혜로운 하느님의 뜻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신앙의 자유와 다양성의 자유가 나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특정종교나 문화에 속하도록 강요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문명 양식의 강요를 비난한다.

사원, 교회, 회당 등 예배장소의 보호는 종교와 인간적 가치, 국제법과 국제협약에 의해 보장하는 의무며 예배장소를 공격하거나 폭탄이나 파괴로 위협하는 시도는 종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국제법의 명백한 위반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포와 비관을 퍼뜨리면서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리즘은 비록 테러범들이 종교를 이용하더라도 이는 경전의 잘못된 해석이 쌓인 것이자 굶주림과 가난, 불의와 억압, 오만의 정책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돈과 무기, 활동계획이나 정당성 부여, 보도를 통해 테러를 지원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이를 세계안보와 평화를 위협하는 국제적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완전한 시민권의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립되고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씨앗을 내재하고 있는 소수자라는 용어의 차별적 사용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교육과 취업과 정치적 권리행사에 있어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필수조건이며 각자의 신앙과 존엄의 원칙들에 위배되는 역사적·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또한 성착취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모든 비인도적 관행과 저속한 관습을 끊어내야 하며 여성들도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법률들을 바꾸기 위해 일해야 한다. 두 지도자는 좋은 가정환경과 음식, 좋은 교육환경에서 자라야 하는 어린이들의 권리를 강조한다. 어린이들의 존엄성이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단죄돼야 하며 그들이 노출돼 있는 위험을 경계하도록 하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 드러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순수함을 사고파는 행위와 어린 시절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 프란치코 교종과 알아즈하르의 대이맘은 이 선언문이 모든 학교와 교육과 양성기관들에서 연구와 묵상자료가 되길 요청하며 선언문이 동서양과 남북이 서로 포옹하는 상징이 되기를 호소한다.  

 

“종교들은 끝자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교종, 아부다비에서 종교 간의 만남에서 종교의 역할 강조

 

UAE를 방문 중인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4일 아부다비의 ‘건국자 기념관’에서 이루어진 ‘인류 형제애’에 관한 종교 간 만남‘에서 세계평화와 공동의 삶을 위한 인류 형제애에 관한 공동문서에 서명했다. 공동문서들은 폭력과 테러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성을 위해, 화해를 돕기 위해, 끝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인간의 마음을 무장해제‘ 할 수 있기 위해 모든 종교가 함께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인류 형제애’에 관한 종교 간 만남‘의 의미를 설명해 준 것은 프란치스코 교종과 알아즈하르의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가 함께 걸어갈 때였다. 참가자들은 형제들처럼 함께 걸었다. 무슬림 원로평의회가 주최한 이 모임에는 여러 종교를 대표하는 700여 종교지도자들이 참여했다. 역대 교종 가운데 처음으로 아랍 에미리트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연설은 이번 순방의 핵심이었다. 연설은 강렬했고 암시가 풍부했으며 종교 간 대화의 가치를 분명히 강조했다. 곧, 종교 간 대화는 민족들과 문화들을 이어주는 다리이고 “끝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교종과 대이맘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단죄함에 있어 형제관계를 선포하고 나서 반대방향으로 행동할 수는 없음을, 또 형제적 공존은 ’교육과 정의‘에 기초한다는 것을 단호히 강조했다. 교종의 연설 후에는 아랍에미리트 건국의 아버지 셰이크 자예드 빈 술탄의 얼굴을 3차원적으로 묘사한 별자리를 배경으로 세계평화와 공동의 삶을 위한 인류 형제애에 관한 문서에 교종과 대이맘이 서명했다. 비처럼 떨어지는 나뭇잎들과 음악이 강조된 이 작품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만나고 서로 알아보면서 포옹하는 순간을 담은 것이다. 교종 연설 내용.

800년 전 아시시의 수사 성 프란치스코와 술탄 알 말리크 알 카밀의 역사적 만남을 기억합니다. 평화를 원하고 촉진하기 위해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왔습니다. 이는 세상 폭풍 속에서 바다를 가르고 나아갈 수 있는 방주, 곧 형제애의 방주 안으로 함께 들어갈 때 보존되는 평화입니다. 어떤 종교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형제애가 하느님의 창조계획 안에 포함된 소명으로 이해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눈에 소중한 존재이기에 모두는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거나 노예일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형태의 폭력은 즉각 단죄되어야 합니다. 형제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은 중대한 신성모독입니다. 종교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형제애’의 원수는 개인주의며, 각 종교의 신앙은 사람들을 특혜와 차별 없이 끌어안는 하늘의 관점을 취하기 위해 벗과 원수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아랍에미리트 노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는 종교가 이용당하지 않고 폭력과 테러를 용인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위험을 당하지 않도록 견제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형제애는 다양성과 다름을 표현하며 올바른 태도는 강요된 획일성도 아니고 타협하는 혼합주의도 아니며 형제들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자비로우신 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성을 위한 노력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대립을 조정하고 다양성 안의 형제애를 추구해야 합니다. 인류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항구하고 일상적이고 효과적인 대화입니다. 타인과 타인의 자유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과 인간의 기본권이 항상, 어디서나 누구에 의해서나 인정되도록 헌신하는 것을 포함하는 ‘타자성(他者性)‘의 용기입니다.

자유 없이는 더 이상 인류가족의 자녀가 아니라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자유 중에서 저는 종교의 자유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단지 예배의 자유만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타인 안에서 참으로 형제를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해주시고 그 어떤 인간적 제도도 하느님의 이름으로도 강요할 수 없는 나 자신과 동일한 인성을 가진 자녀를 봅니다.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입니다. 각자 자신의 신앙과 생각과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누립니다. 종교와 피부색과 성(性)과 민족과 언어의 다원주의와 다양성은 하느님의 지혜로우신 뜻이며, 그 뜻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존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종교 간 대화의 미래가 바로 형제들 사이의 기도며, 민족과 문화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시급한 과제를 이행하기 위한 다양성의 조화입니다. 인류가족이 화해의 능력과 희망의 비전과 평화의 구체적 행보를 성숙시켜가도록 돕기 위해 종교들이 용감하고 대담하고 성실하게 더욱 적극적으로 헌신할 때가 왔습니다. 형제를 아는 것은 자신에게만 집중한 채 경직되려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열린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토대입니다. 교육한다는 것은 폭력과 증오와 편견의 씨앗에서 뇌관을 제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의는 불가결하게 평화와 맞물려 있으며, 따라서 종교들은 탐욕과 이득이 인간의 마음을 무기력하게 한다는 것과 시장의 법칙이 ‘만남, 대화, 가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들은 끝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통계수치가 아니라 형제들입니다. 종교들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야 합니다. 갈등의 밤에 형제애의 파수꾼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인류가 불의 앞에서 눈을 감지 않고, 너무도 많은 세상의 드라마 앞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호소하며 깨어 지켜야 합니다.

무관심은 내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막을 바라보면서, 사막이 피어나는 것을, 사막이 나라를 위한 발전이 되는 것을 보면서 타인에게 무관심할 때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이 없습니다. 무관심은 돈벌이를 넘어서서 인류공동체를 보지 못하게 하며, 형제가 하는 노동을 넘어서서 형제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무관심은 사실 내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피조물의 미래를 개의치 않고 나그네의 존엄성과 어린이들의 미래를 돌보지 않습니다. 종교들의 또 다른 과제는 교육과 정의에 기초한 형제적 공존, 환대하는 포용과 모든 사람의 권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인간발전으로서 평화의 씨앗을 싹트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은 인간의 마음을 무장해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무기에 의존하기, 자신의 영향력의 범위를 확장하기,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공격적인 정치는 결코 안정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은 오직 참상을 만들어낼 뿐이고 무기는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전쟁이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모든 뉘앙스를 제거할 종교의 의무를 강조합니다. 수많은 갈등에서 오는 혐오와 폭력의 홍수와 이타주의의 사막화를 향해 신뢰의 메시지를 함께 제공할 필요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저는 특별히 예멘,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인류가족 안의 형제들로서, 함께 무력의 논리에 맞서, 인간관계들을 돈으로 환산하는 상황에 맞서 함께 노력합시다. 국경을 무장하며 장벽을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이 모든 일에 맞서 기도라는 감미로운 힘과 대화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노력을 기울입시다.   

 

“사제들은 돈 보스코처럼 즐거워하십시오”

교종, 성 요한 보스코 기념일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 요한 보스코 기념일인 1월31일 산타 마리아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성인의 삶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제들은 사무원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 백성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과 하느님의 눈을 가질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사제들은 돈 보스코 성인처럼 항상 즐거워하라고 권고했다. 강론 내용.

사제들은 성 요한 보스코처럼 항상 즐거워해야 하며 하느님 백성들과 세상을 인간의 눈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돈 보스코 성인처럼 아버지와 스승의 마음으로 현실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돈 보스코의 시선은 하나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거리의 가난한 젊은이들을 보았고 그들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으며, 그들을 성숙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걸어갔으며, 그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돈 보스코의 사제서품식 날의 일화를 기억합니다. 그날 겸손한 농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지도 않았지만 돈 보스코에게 마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고통이 시작될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하나의 현실을 강조하길 원했습니다. 곧 자신의 아들이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한 어머니의 예언’입니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제에게 있어 고통은 어떠한 일들이 잘 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것은 ‘고행자의 얼굴’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 보스코가 했던 것처럼 인간의 눈과 하느님의 눈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프리메이슨’ 시대로 반성직자 시대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진짜로 가난했고 방치되었던 닫힌 귀족주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돈 보스코는 거리 위의 젊은이들을 보았고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돈 보스코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형제의 눈으로,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돈 카파소의 보살핌에서 멀어져 비인간적인 교수형에 처해지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그는 인간적으로 마음이 움직였으며, 젊은이들을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눈으로 상황들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께서는 이 사람들을 온전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비극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전례는 그를 아버지요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빛과 같은 것을 청하는 거지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돈 요셉 카파소 성인은 19세경 토리노에서 수감자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으며, 자주 사형수들이 사형되는 곳까지 따라가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는 성 요한 보스코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제는 두 가지 축을 가져야 합니다. 그 두 가지 축이란 ‘현실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하느님의 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긴 시간 감실 앞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그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단지 교리서와 십자가만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다면 젊은이들이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봐요”라고 말했겠죠.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의 활기를 가지고 그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들에게 운동을 시키고, 형제들처럼 그룹을 만들게 했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함께 걸어갔고, 함께 느꼈으며, 함께 보았고, 함께 울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사제였으며, 항상 그들 가까이 있었습니다. 사제는 직원도 공무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이 공무원이 된다거나, 예를 들어 ‘오후 3시부터 5시반까지’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능한 공무원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는 공무원이 아니며, 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가지는 것에 도달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이자 형제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지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맞서 싸울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제는 하느님과 투쟁하는 사람입니다.

신적인 것 없이 너무 인간적으로만 바라보는 위험이나 인간적인 것 없이 너무 신적으로만 바라보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있을 때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형제는 형제를 위해 위험을 감수합니다. 이는 확실히 고통을 수반합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뒷담화도 시작됩니다. 공으로 창문을 깨뜨리는 무례한 청소년들과 함께 돈 보스코 사제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기쁨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했고 매일의 양식을 벌어들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으며,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 자비가 무엇인지 알았던 성 요한 보스코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돈 보스코는 하느님으로부터 커다란 마음을 받았습니다. 한 사제가 인간의 눈과 하느님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면서 잘 있다는 표징이 무엇일까요? 기쁨입니다. 즐거움입니다. 사제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다면 즉각 멈추어 서서 그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돈 보스코의 기쁨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기쁨의 스승입니다. 물론 그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오늘 성 돈 보스코의 전구를 통해, 우리 사제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사제들은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목적인 일을 바라보고, 인간과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 백성을 바라보는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의 기초는 일치와 충실”

교종, 바티칸 공소원 법원직원 대상 연설

 

프란치스코 교종이 1월29일 사법연도 시작을 위해 모인 공소원 법원 직원들과 변호사, 협력자들을 대상으로 혼인성사를 주제로 연설했다. 연설 내용 요약.

세속화의 물결이 밀려드는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복음에 따른 삶의 스타일을 증언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혼인성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적절한 영적, 사목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모든 부분에서 일치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혼인에 대한 신학과 교회 혼인법만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 본질의 근본 초석은 두 가지입니다. 일치와 충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부부 결합의 법적 의무들과 이 두 가지 혼인의 선익은 세례 신앙의 현현(顯現)이 되어야 합니다. 유효한 계약이 되기 위해 혼인은 양측이 상대방과의 온전한 일치와 조화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 요구됩니다. 각자의 인간적, 윤리적, 정신적 풍요로움의 교환을 통해 마치 서로 연결된 관들과 같은 방식으로 부부가 한 몸이 되기 위해서이지요. 혼인은 또한 평생토록 충실의 임무를 요구합니다. 충실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관대한 일치 안에서 충실한 사랑으로 혼인생활 하는 부부는 교회를 위한 소중한 사목적 도움입니다. 일치와 충실로 살아가는 부부는 하느님 모상을 잘 반영해 줍니다. 기쁜 소식은 이것입니다. 곧 충실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성직자들에게 그러하듯 부부에게도 충실은 하나의 은총의 선물이니까요. 그 소식은 복음적 사랑으로 충만한 주교와 사제들의 직무도 더욱 강화시켜주고 위로해야 할 소식입니다. 혼인의 포기할 수 없는 필수적인 두 가지 선익이라고 정의한 일치와 충실은 장차 혼인할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설명되어야 할 뿐 아니라 교회의 사목적 활동을 재촉하기도 합니다. 가정의 형성과 발달의 여러 단계에서 가정을 동반하기 위해서는 혼인을 ‘먼 준비’, ‘가까운 준비’, ‘영속적 준비’로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을 위한 양성의 주된 주체는 사목자입니다. 다양한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대단히 적절할 뿐 아니라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들은 교구장 주교와 본당 주임사제의 지도 아래 이러한 사목의 공동책임을 지닙니다. 그러니까 사목자의 일차적 책임에 덧붙여지는 것은 혼인을 촉진시키고 영적, 양성적 지원으로 가정들을 동반함에 있어서 공동체의 능동적 참여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협력자요 성 바오로의 사명의 가장 충실한 동료에 속했던 아퀼라와 프리스퀼라 성인 부부의 경험을 상기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분들처럼 굳건한 신앙과 사도정신을 가진 부부의 은사를 높이 평가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제들을 교회에 내려주시도록 성령께 청합시다. 혼인과 가정의 선익을 위한 교회의 꾸준하고 지속적인 사목적 보살핌의 수단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특히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하느님 말씀에 다가가기, 교리교수를 위한 모임, 성사거행, 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하기, 영적담화와 영적지도, 가족들로 이루어진 단체들과 자선 봉사단체들에 참여하기 등입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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