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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1월 25-30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젊은이들은 내일을 위한 오늘”

교종, 1월 30일 수요 일반접견 세계청년대회 설명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30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시간을 통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를 주제로 열린 파나마 제34차 세계청년대회 참석한 사도적 순방 결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교종은 젊은이들이야 말로 장벽과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세계평화를 위한 누룩이라고 강조했다. 교육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저는 최근에 있었던 파나마 사도적 순방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회와 사랑하는 파나마 국민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해 저와 함께 주님께 감사를 드려 주십시오. 큰 신앙과 열정으로 여기저기에서 저를 맞아주신 많은 신자들과 따뜻하고 가족적인 환영을 해 주신 파나마 대통령과 당국자들, 주교님들과 자원봉사자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파파모빌레(교종 전용차)가 지날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양손으로 들어 올린 장면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녀들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말했습니다. “저의 자부심과 미래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버지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존엄한 행위며 인구절벽 현상에 처한 유럽을 향한 감동적 메시지인가! 이 가정들의 자부심은 자녀들입니다. 미래를 위한 확신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 없이는 인구절벽 현상의 겨울을 나기 힘들 것입니다. 

이번 사도적 순방 이유는 세계청년대회였지만 젊은이들과의 만남은 당국자, 주교, 감옥에 갇힌 젊은이, 수도자 그리고 그룹홈 같은 파나마의 다른 현실과 얽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의 기쁨에 넘친 참여로 모든 것이 감염되고 융합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축제였고 파나마를 위한 축제였습니다. 또한 많은 비극으로 점철되어 희망과 평화와 진정한 정의가 필요한 중앙아메리카 전체를 위한 축제였습니다. 세계청년대회에 앞서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아메리칸 젊은이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원주민 젊은이들과 아프리카계 젊은이들은 5일간 만났습니다. 파나마에는 이런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세계청년대회 문을 열었습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시도였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기에 전 세계에서 도착한 젊은이들이 모임으로써 대회의 특징인 다양한 언어와 민족의 커다란 심포니를 이뤄 냈습니다. 즐거움이 가득한 젊은이들의 손 안에서 춤추고 휘날리는 다양한 깃발들을 보는 것은 예언자적 표징이었습니다. 장벽들을 높이고 보편성과 민족들 간의 만남을 거부하는 오늘날의 갈등적 민족주의의 슬픈 경향에 맞서 싸우는 표징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세상에서 평화의 누룩이라는 표징입니다.

이번 세계청년대회는 성모님 인상이 강력했습니다. 이번 대회 주제가 천사에게 대답하는 동정녀의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5개 대륙을 대표하는 젊은이들에게서 이 말씀을 듣는 것과 그들의 얼굴 위에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가 있는 한 세상에는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세계청년대회 여정에는 항상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은 그리스도인 삶의 학교입니다. 그곳에서 참을성 있고 내세우지 않으며, 구체적인 사랑을 배웁니다. 여러분에게 비밀 한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좋아합니다. 그 기도는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든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어느 분이 준 포켓사이즈 ‘십자가의 길 기도문’을 갖고 다닙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기도문을 들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십시오. 그 기도는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참을성 있고 내세우지 않으며 구체적인 사랑을 배웁니다. 젊은이들은 예수님과 마리아와 함께 중앙아메리카와 전 세계 고통받는 많은 형제자매의 짐을 지고 파나마로 왔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생활과 빈곤의 피해자인 젊은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성년 재소자들을 위한 재활원에서 제가 주례했던 참회예절과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들이 지내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 방문은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세계청년대회의 절정은 밤샘기도와 젊은이들과 봉헌한 미사였습니다. 밤샘기도가 있던 메트로파크는 젊은이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잠자고 아침 8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밤샘기도 동안 열정적이지만 침묵과 경청을 할 줄 알았던 소년소녀들이 생생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열정에서 경청과 침묵기도 사이를 오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마리아를 자신의 작음 안에서도 다른 누구보다도 인류역사에 영향을 준 인물로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하느님의 ‘인플루언서’로 불렀습니다. 마리아 안에서 일부 젊은이들의 아름답고 힘찬 증언이 드러났습니다. 주일아침 거행된 폐막미사 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새롭게 세상의 젊은이들을 향해 바로 ‘오늘’ 복음을 살도록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은 내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내일을 위한 오늘’입니다. 젊은이들은 ‘잠시 동안’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와 세상의 ‘오늘이고 지금’입니다. 그리고 저는 새로운 세대들이 교육, 직업, 공동체, 가족의 결여를 느끼지 않도록 해 달라고 어른들의 책임감에 호소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에서 중요한 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육, 곧 가르침입니다. 직업. 많은 젊은이들이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가정과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길 바랍니다. 중앙아메리카 모든 주교님들과 만남은 저를 위한 특별한 위로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의 증거를 통해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 가까이 사제들과 하느님의 거룩하고 충실한 백성들 가까이에서 로메로 대주교님의 모토였던, ‘교회와 함께 느끼는’ 것을 더 잘 배울 수 있도록 내어 맡겼습니다. 강력한 상징적 가치를 가진 행사는 파나마 안티구아의 성모마리아 주교좌 대성당 제대봉헌식이었습니다. 대성당은 보수를 위해 7년 동안 닫혀 있었습니다. 하느님 영광과 그분 백성의 신앙과 축제를 위해 다시 찾은 아름다움의 표징입니다. 제대를 축성한 성유는 세례받는 이들과 견진받는 이들, 그리고 사제와 주교들을 축성하는 것과 똑같은 성유입니다. 파나마와 온 세상에 있는 교회공동체가 성령께서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젊은 선교 제자들의 순례가 계속해서 지상으로 퍼져 나가길 바랍니다.  

 

“사제 독신주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다”

교종, 기내회견 독신제, 낙태, 아동 성학대 견해 피력

 

프란치스코 교종이 파나마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기내 회견을 통해 사제 독신제와 낙태문제 이민자와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여러 현안에 대해 견해를 피력했다. 교종은 2월 바티칸에서 열리는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회의의 다소 과도한 기대에 우려하면서 성학대 문제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교회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와 가정에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교종은 많은 주교들이 이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 회의를 소집하게 됐다며 주교회의에 이 문제에 관한 교육을 제공할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따라서 교종은 학대문제의 심각성 인식제고, 주교들을 위한 학대문제 대응방법 등이 2월회의 중점과제라고 말했다. 또한 기자는 낙태에 반대하는 교회의 다소 과격한 입장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의 고통을 헤아리는 태도라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교종이 전하는 자비의 메시지에는 어떻게 부합하는지 물었다. 교종은 자비의 메시지는 모두에 해당되며 태아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했다. 교종은 이것이 쉽지 않은 자비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시므로 낙태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그 사람과 동행하고 위로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교종은 낙태의 비극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해소에서 그들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이번 파나마 방문은 전반적으로 기대에 부합했다며 이번 방문을 마음에 품고 주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교종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증거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며 특히 사제, 주교, 교종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했다. 특히 교종은 사목자 외에도 ‘위선적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서 멀어진다며 그들이 모범적 ‘증거자’가 될 생각이 없다면 가톨릭 신자로 자라긴 했지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제독신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교종은 “로마가톨릭 사제들의 독신주의에 관한 규정을 수정할 바에는 목숨을 내놓겠다”는 바오로 6세 교종의 말을 인용하면서 개인적으로 독신주의가 교회를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며 독신주의를 선택사항으로 바꾸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했다. 그러나 교종은 이 문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며 피치 못할 예외적 상황에는 규율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성교육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교종은 성교육은 필요하지만 ‘이데올로기적 식민지화’에 물든 교육은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실제 몇몇 교육방법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교종은 가정 안에서 부모님과 함께 성교육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교종은 현재 고통받는 베네수엘라 국민 모두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교종은 특히 베네수엘라 상황이 유혈사태로 비화될까 봐 정말 두렵다고 우려했다. 또한 교종은 이민자 문제에 대해 이는 매우 복잡한 사안이지만은 ‘받아들임’과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이민자들은 현지에 잘 적응할 수 있을 테니 정부지도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종은 유럽에서 그리스와 이탈리아, 중동에서는 레바논과 요르단을 관용을 실천한 국가들로 꼽으면서 이민문제가 편견 없이 다뤄져야 할 복잡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회견을 마치며 교종은 파나마 방문소감을 밝혔다. “파나마에서 저는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파나마에서 저는 고결함을 발견했습니다. 유럽에는 없지만 파나마에는 있습니다. 파나마 부모들은 아이들이 나의 ‘성공’이자 ‘자랑’이며 ‘미래’라고 말합니다. 유럽은 현재 인구절벽의 ‘겨울’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습니다.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자랑입니까? 관광? 휴가? 저택? 강아지입니까? 아니면 아이들입니까?”라고 교종은 힘주어 강조했다.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교종, WYD 폐막미사 “청년들 미래가 아닌 현재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27일 파나마 세계청년대회 폐막미사에서 청년들에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재입니다.”라고 격려했다. 이날 폐막미사에는 청년들과 일반신자 등 70만여 명과 파나마,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과테말라, 온두라스, 포르투갈 대통령들도 함께했다. 강론내용 요약.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0-21) 이와 같이 복음은 예수님의 공적 사명의 시작을 소개합니다. 지인과 이웃에게 둘러싸여 있고 어쩌면 그분에게 율법을 가르쳤을 어린 시절 교리교사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분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봤던 회당에서 이를 소개했습니다. 그 공동체 중심에서 성장하셨고 교육받으셨던 스승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 그분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하느님의 꿈을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선포하셨던 말씀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입에 담으신 말씀은 현실을 실현시키며 현재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그분의 ‘지금’에 참여하도록 부르시기 위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의 지금’을 계시하십니다. 이 하느님의 시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과 더불어 현재가 되고 얼굴이 되며, 살이 되고 자비의 사랑이 되는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상적이거나 완벽한 상황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그 실현을 위한 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상황과 공간을 적절한 기회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시작해서 약속된 미래는 삶이 됩니다. 언제입니까? 지금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이들이 초대받거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나자렛 모든 이웃이 그토록 기대했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들을 초대했고 그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봤으며 알고 지냈던 누군가를 믿을 준비를 갖추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친근하고 현실적인 분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 친구, 가족처럼 알고 지내던 어떤 사람을 통해 그분께서 행동하시고 나타나신다는 것을 항상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당신 나라를 위해 일하고 그분과 함께 손을 더럽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실 수 있음을 항상 믿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화되고 그분의 모든 고통스럽고 영광스러운 변화와 더불어 역사 안에서 거의 경험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멀리 계신 하느님을 선호할 때 나자렛 이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 하느님은 아름답고 좋으시며, 관대하시고 잘 묘사된 분이시지만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분이시고 특히 폐를 끼치지 않는 분, ‘길들여진’ 하느님이십니다. 가깝고 일상적인 하느님, 친구요 형제인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일상성과 형제애를 배우라고 요청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천사적이거나 구경거리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형제요 친구의 모습, 구체적이고 친근한 모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실제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실제적인 분이시고 사랑은 구체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구체적인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구체성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적 요소 중 하나를 구성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복음이 구체적 삶이 될 때, “그런데 이 아이들은 마리아, 요셉의 아이들, 누구누구의 형제들이 아닌가? 누구누구의 친척이 아닌가? 우리가 자라도록 도와줬던 소년들이 아닌가? 쉿, 조용히 해, 저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저 아이는 항상 축구공으로 유리창을 깨뜨렸던 아이가 아닌가?”라고 수군대기 시작할 때 우리고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위험을 무릅쓸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길들이고 싶어 하는 것은 매일 우리가 겪는 유혹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과 소명, 여러분의 삶이 오직 미래를 위해 가치가 있고 현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마다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치 청년이라는 것이 자신의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위한 ‘대기실’과 동의어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 시간이 실현되는 ‘동안’ 위생적으로 잘 포장되고 아무런 결론 없이 확실하게 구성되고 보장된 미래를 우리가 여러분을 위해 만들거나 혹은 여러분 스스로 만듭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실험실 같은 미래를 제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오늘의 기쁨, 구체적인 기쁨, 사랑의 기쁨이 아닌 기쁨의 ‘위선’입니다. 여러분이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너무 물의를 일으키거나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과 우리를 문제 삼지 않도록 기쁨의 위선을 통해 여러분을 안심시키고 잠재우는 겁니다. 이 ‘잠시 동안’ 여러분의 꿈은 제 몫을 잃게 되고 질질 끌려가게 되고 잠들기 시작하며, 작고 슬픈 환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다만 아직 여러분의 ‘지금’이 아니고 내일을 꿈꾸고 건설하는 데에 참여하기에는 여러분이 너무 젊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계속 여러분을 후순위로 미룹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아십니까?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제발, 이런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지금‘을 살고 싶어 하도록 그들을 도와줍시다. 최근 주교 시노드 결실들 중 하나는 만날 수 있는 특히 경청할 수 있는 풍요로움이었습니다. 세대 간 경청과 교류의 풍요로움과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내일을 꿈꾸며 건설하는 데에 참여하는 채널과 공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인식의 가치를 말하는 겁니다. 공동으로 한 공간을 조성하면서 고립되지 말고 일치해야 합니다. 이 공간은 선물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투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삶은 오늘이기 때문에 젊은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오늘이라는 공간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에게 내일이라는 날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오늘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도 오늘이며, 여러분 공간도 오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불러 모으시고 여러분의 공동체로 부르시며, 할아버지 할머니, 어르신들을 찾아 뵈러 가도록 여러분의 도시에서 부르십니다. 일어서서 그들과 함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꿈꾸게 하신 그 꿈을 실현시키고 그 말씀을 듣도록 부르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는 말씀처럼, 지금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여러분의 상상을 지배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연관시킬 것입니다. 아침에 여러분을 일어나게 만들고, 피곤한 순간에 여러분을 자극하는 것이 될 것이고 여러분 마음을 찢어버리고 그곳을 경이로움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워 주는 것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소명을 느끼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며 모든 것이 이것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만일 사랑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면 모든 것이 부족할 것입니다. 오늘 사랑의 열정!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해 주시고 내일을 향해 인도해 주시도록 맡겨 드립시다! 예수님께는 ‘잠시 동안’이라는 것이 없으며 마음속을 관통하고 정복하길 원하시는 자비로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보물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에서 잠시 동안이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놓도록 초대하시는 증여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그분의 확실한 사랑을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지속적인 “네”라는 응답이 그 사랑에 이르는 문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성령께서 교회와 세상에 새로운 성령강림을 선사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  

 

 

“희망을 가지는 것에 지치지 마십시오”

교종, 파나마 수도자와 평신도단체에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26일 파나마 안티구아의 성모마리아 주교좌 대성당에서 제대 봉헌식과 함께 미사를 집전했다. 평신도 단체들과 수도자들이 참석한 미사 강론에서 교종은 요한 복음 4장에 나오는 여행길에 지쳐 우물가에 앉아 쉬시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빌려 앞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나오는 ‘꼼짝달싹 못하는 피로감’의 형태를 지적했다. ‘희망의 피로감’이다. 강론 내용.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요한 4.6) 요한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여행길에 지쳐 우물가에 앉아 쉬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때는 정오였고, 예수님께서는 길을 걷느라 지치셨습니다. 이러한 지친 상태에서 우리 백성들과 우리의 공동체와 지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극심한 피로감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제, 남녀 수도자들과 평신도단체 회원들 안에는 각자의 여정에서 지치게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긴 노동시간으로 먹고, 휴식하고, 가정에 머물 시간이 부족하게 되며 급기야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고,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해로운 감성과 노동조건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이 갈증과 피로감을 충족시키고 안정시킬 수 있도록 우물을 발견해야 한다는 시급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꼼짝달싹 못하는 피로감’은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쬐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거나 앞으로 나가거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열기를 쏟을 때 생겨납니다. 이러한 피로감은 현실이 우리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이 세상에서 힘과 재능과 사명의 실천력을 의심하게 만들어 많은 것을 바꾸고 논란을 일으킬 때 미래 앞에서 생겨납니다. 희망의 피로감은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 입은 교회를 확인하는 것에서도 생겨납니다. 많은 경우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라는 스승의 외침 안에 숨겨진 수많은 절규를 들을 줄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는 불확실하고 알지 못하는 미래 앞에서 지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우리 공동체 중심에 ‘회색의 실용주의’가 자리 잡게 합니다. 우리 시대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나쁜 이교들 중 하나에 자리를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곧 주님과 우리 공동체가 그런 이교를 품고 있는 이 새로운 세상에 아무런 할 말도 없고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10)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옆을 지나가셨고 자비로운 눈길로 바라보셨으며, 그분을 따르라고 요구하셨을 때 그 첫사랑의 바탕이 되는 우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는 것은 정화되도록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원초적인 카리스마의 가장 진정성 있는 부분을 회복하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수도생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어떤 양상으로 오늘을 표현할 수 있는지 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구원경로로 그 과정을 기억하는 사람들로 변화시키실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제 그분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내일도 계속 행하시리라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근원으로 가는 것은 두려움 없이 현재를 적합하게 살아가도록 분명히 우리를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일들에 몰입하여 구원의 역사와 함께 전력을 다하는 열정을 갖고 삶에 응답하며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사랑에 빠질 만한 열정입니다.  

 

 

“‘네’ 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교종, 세계청년대회 밤샘기도 연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밤샘기도를 바치기 위해 파나마시티 메트로파크에 운집한 60만 명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면서, 하느님의 “인플루언서”인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강조했다. 연설 요약.

사랑하는 젊은 친구들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생명의 나무에 관한 아름다운 프레젠테이션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 ‘러브 스토리’라는 것과 우리 삶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 뒤섞이고 싶어 하는 ‘삶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삶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개개인 스토리와 뒤섞인 ‘러브 스토리’의 일원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으며, 우리 가운데 태어나길 원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씨를 뿌리시고 싹을 틔우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삶에 “네”라고 말씀하신 첫 번째이시며 항상 우리를 앞서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역사에 “네”라고 말씀하신 첫 번째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네”라고 말하길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첫 번째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마리아를 놀라게 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마리아를 이러한 ‘러브스토리’의 일원이 되라고 청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젊은 여인은 당시 ‘소셜 네트워크’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이 되셨습니다. 단순히 몇 마디로 마리아는 “네”라고 말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유일한 힘인 하느님의 사랑과 약속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내면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을 모셔야 합니다. 묵상해 봅시다. ‘나는, 하느님이 나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그 젊은 여인이 천사에게 말한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에 감명을 받습니다. 이는 단순히 수동적인 수락도 아니고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마리아는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네”라고 말하면서 곧바로 그 지점으로 나갔습니다. 그것은 기꺼이 감수하고 무릅쓰며 헌신할 준비가 된 사람의 “네”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 각자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여깁니까? 앞으로 나가기 위해 내 마음 안에는 무슨 약속이 있는가?’ 마리아의 약속은 의심할 바 없이 어려운 미션이 될 터이지만 눈앞에 닥친 도전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상황이 복잡해지겠지만 마리아는 위험을 무릅썼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마리아는 강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인플루언서’입니다! 그 “네”와 섬기려는 열망은 의심과 어려움보다 강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네”가 어떻게 모든 세대에 울려 퍼지는지에 관해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수많은 젊은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증언해 준 에리카와 로젤리오에게 감사합니다. 그들은 용감했고 박수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딸 이네스의 탄생과 관련해 맞닥뜨려야 했던 위험과 두려움과 어려움을 우리와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부모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질병이나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녀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네, 사실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딸이 태어났을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이 태어나기 전에 모든 문제들에 부딪혔을 때 그들은 결심했고 마리아처럼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딸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약하고 무력하며 도움이 필요한 딸의 인생에 대한 에리카와 로젤리오의 대답은 “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네스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용기를 지녔던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주님께 “네”라고 말하는 것은 연약함, 소박함, 그리고 종종 짜증이나 갈등으로 점철되어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뜻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에리카와 로젤리오가 말한 것과 같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약점과 결함을 지닌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완벽하거나 순수하거나 정제된 것만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장애인이나 허약한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까? 또 다른 질문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대답하는지 봅시다. 외국인, 실수한 사람, 아프거나 감옥에 있는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시각장애인, 중풍병자, 바리사이, 죄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도 죄수를 받아들이셨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직 사랑받은 사람만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따라해 볼까요? “사랑받은 사람만이 구원될 수 있다.” 

잊지 맙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본성에 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거스르는 온갖 것을 할 수 있지만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사랑받은 사람만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진 사람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 모든 약점이나 결함보다 더 큽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이러한 결함 통해 ‘러브 스토리’를 쓰고자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방탕한 아들을 받아들이셨고 배반한 베드로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항상, 항상, 항상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일어나서 제 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최악의 타락은 우리의 삶을 망치고 넘어진 채로 머물며 우리 스스로를 도움받을 수 있게 내어 놓지 않는 것입니다. 등산하면서 부르는 아름다운 알프스 노래가 있습니다. “등산의 기술에서, 승리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채로 머물지 않는 것이다.” 넘어진 채로 머물지 마십시오.

첫 번째 단계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본 생명의 나무입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나눠 주고 증언해 준 알프레도에게 감사합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감동받았습니다. “저는 건설 프로젝트 업무를 시작했지만 그 일이 끝나면 직업이 없어지고 상황은 급속하게 변합니다. 교육도 없고 거래도 없고, 직업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바싹 마르게 하는 것을 이 네 가지 ‘없는’ 것을 요약해 봅시다. 직업, 교육, 공동체, 가정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뿌리 없는 삶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죽이는 네 가지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땅에 붙들어 주고 지탱해 주는 굳건한 뿌리가 없다면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이럴 때 표류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나이든 사람들 각자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나이든 사람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제공하는 뿌리는 무엇인가? 젊은이들이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가 제공하는 기반은 무엇인가?’ 젊은이들로부터 직업, 교육, 공동체, 기회 등을 빼앗을 때 젊은이들을 비판하기 쉽습니다. 직업, 교육, 공동체, 기회는 젊은이들이 뿌리를 취하고 미래를 꿈꾸는 데 필요합니다. 교육 없이 미래를 꿈꾸는 게 어렵습니다. 가정과 공동체 없이 미래를 꿈꾸는 게 불가능합니다. 미래를 꿈꾸는 것이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것뿐 아니라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 곧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분에 대한 물음입니다. 우리 나이든 사람들이 직업, 교육, 공동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가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알프레도의 말처럼, 직업, 교육, 공동체, 가정 없이는 마지막에 가서는 상실감이나 공허한 느낌을 갖게 되고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익한 것으로도 채우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싸워 가며 사랑하기 위한 누군가를 더 이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나이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미래를 세우고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영감을 장려하는 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젊은이들이 교육, 직업, 가정, 공동체를 가질 수 있도록 확실한 노력을 할 수 있습니까?’ 나이든 사람들 각자는 마음속에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젊은이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저에게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왜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은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나요? 왜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나요? 왜 젊은이들은 지루하고 삶의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요?” 저는 그들의 생각을 되물었습니다. 당시 저를 감동시킨 특별한 대답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알프레도가 나눈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부님, 수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타인을 위해 존재하길 멈췄습니다. 가끔 그들은 투명인간처럼 느낍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들이 타인과 가정을 위해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길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종종 투명인간처럼 느낍니다. 이는 ‘버림받음의 문화’며 타인에 대한 관심부족입니다. 모든 사람들까지는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여할 것이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참여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들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형제자매나 사회를 위해 존재하길 그쳤는데 그들이 하느님 존재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마약의 손아귀에 빠져 젊은이들을 파괴하는 미래를 보지 말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본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그들을 비판하는가, 아니면 무관심한가? 나는 그들을 도울 것인가, 무관심할 것인가?” 오래전에 존재하기를 그친 것이 나에게 진리로 다가올 수 있겠습니까?

요한 보스코 성인을 생각해 봅시다. 성인은 먼 곳이나 특별한 곳에서 젊은이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단순히 하느님의 눈으로 도시에서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성인은 교육받지 못하고 직업이 없으며 공동체의 도움이 없는 채로 남겨진 수많은 젊은이들과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과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젊은이들을 비난하기 일쑤였고 하느님의 눈으로 젊은이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젊은이들을 보아야 합니다. 돈 보스코 성인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인은 ‘그 자체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첫걸음을 내디딜 에너지를 발견했습니다. 다음 성인은 젊은이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꾸려 일하고 공부하게 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두 번째 단계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젊은이들에게 천국에 닿을 수 있도록 뿌리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사회에서 의연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꼭 붙잡을 수 있는 뿌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길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 안전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기. 이것이 성인께서 한 일입니다. 이는 젊은이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공동체가 하는 일입니다. 나이든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눈으로 젊은이들을 보시겠습니까? 저는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지역이 ‘그리스도의 커다란 가정집’으로 불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 나무가 항상 희망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린다 해도 움이 트고 싹이 그치지 않습니다”(욥 14,7) 이는 니르민이 크라쿠프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 경험한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환대하는 활기차고 행복한 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공동체는 그녀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발견한 기쁨을 누리게 했습니다. 사실 니르민은 예수님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녀는 뿌리를 보기 위해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때까지, 소속감을 줄 때까지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그녀가 우리에게 말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언젠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한 성인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의 진보란 단순히 최신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시장에 나온 첨단기기를 구매하는 것으로만 구성되는가? 이런 것들이 인간 존재로서의 위대함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이런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저도 젊은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식의 위대함을 원합니까? 위대함이란 단순히 최신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위대한 것을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성모님은 이를 이해하시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에리카와 로젤리오 니르민도 이를 깨닫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우리가 여기서 들은 것들입니다. 젊은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제서야 여러분이 제대로 대답하는 방법을 배웠군요. 고맙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아프고 연약하고 허약한 이들이나 노인들의 숫자나 죄인들의 숫자가 적어지는 방식으로는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에게 말했던 이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 때 미래의 탄생을 끌어오기 위해 용기를 지니고 모든 것을 변하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믿는 이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나아질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와 같은 “인플루언서”가 되길 바랍니까? 성모님께서는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용기를 지니고 계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듭니다. 논쟁하고 약자를 괴롭히며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하는 방식으로는 어렵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며 충만하게 해 줍니다. 나머지 것들은 좋을 수는 있지만 무익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조금 뒤에 우리는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족, 고국의 다양한 상황들 말입니다.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마음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지니십시오. 그분께서 당신 사랑의 불꽃으로 새롭게 하시도록, 여러분의 온갖 약점과 결함들과 함께 삶을 기꺼이 품어 안을 수 있도록 온갖 장점과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있는 존재와 깨어 있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살아 있음과 깨어 있음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러브 스토리’의 일원이 되길 원한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위대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만나실 때, 저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삶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뿌리를 잘 돌볼 수 있도록, 마리아처럼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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