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대화는 평화위한 결정적 요소”

교종, 2월 6일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아랍에미리트 방문성과 설명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 6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시간에 “동서양의 교차로, 다민족과 다종교의 오아시스”로 만남의 문화를 장려하는 적절한 장소가 된 아랍에미리트(UAE) 사도적 순방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교종 가르침 내용.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최근 저는 아랍에미리트에 사도적 순방을 다녀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방문이었습니다. 이번 순방은 2017년 이집트 알자즈하르에서 가졌던 만남의 연결선상이며, 인류 형제애를 기반으로 세계평화를 증진하겠다는 약속을 다짐하면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쓴 것입니다. 저의 순방은 처음으로 로마 교종이 아라비아반도를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술탄 알 말리크 알 카밀을 만난 지 800년 만에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진 교종이 아라비아반도를 방문한 것은 하느님 섭리였습니다. 순방동안 저는 자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이 순방 내내 여러 행사에 참석하는 동안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 마음 안에 둘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저의 마음 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었으며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전쟁과 불의와 빈곤의 희생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대화가 현대세계 평화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큰 호의로 저를 환영해주신 아랍에미리트 왕세자와 모든 정치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랍에미리트는 지난 십여 년 동안 괄목할 성장을 이룬 나라입니다. 동서양의 교차로 다민족과 다종교의 오아시스로 만남의 문화를 장려하는 적절한 장소가 된 나라입니다. 가톨릭교회 공동체를 위해 이번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신 남아라비아 대목구장 폴 힌더 주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애쓰시는 사제, 수도자, 신자들에게도 애정 어린 저의 감사를 전합니다.

제가 갔을 때 그곳에 많은 가톨릭 공동체를 세우신 올해 90세 되신 첫 번째 사제와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휠체어에 앉아 계셨고 앞을 보지 못하셨지만 그분 입술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많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한 미소였습니다. 저는 또한 그분과 비슷한 연배 신부님과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브라보! 그곳에는 레바논, 인도, 필리핀,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로마전례, 시로말라바르 전례, 시로말란카라 전례, 마론 전례를 거행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위해 많은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부다비에서 행한 연설 외에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와 알아즈하르의 대이맘이 함께‘인류 형제애’에 대한 선언문에 서명한 것입니다. 이 선언문에서 우리는 모든 남녀들이 하느님의 자녀들로 서로 형제가 되어야 하는 공동소명을 함께 확인했습니다. 또한 모든 형태의 폭력,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을 단죄했으며, 전 세계에 진정한 가치와 평화를 전파하는데 노력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여러 나라의 학교와 대학에서 이 선언문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선언문을 읽고 그 내용을 알아보시길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언문은 인류 형제애에 관한 대화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많은 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문명 간의 충돌을 보려는 유혹이 강하고 또한 종교를 갈등의 원인으로만 생각하는 유혹이 강한 이 시대에서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있으며, 서로 존중하고 대화할 수 있으며 문화와 전통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세계는 공통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명확하고 단호한 표징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표징은 바로 생명, 가정, 종교적 감각, 어르신 존중, 젊은이 교육 등입니다.

아랍에미리트에는 백만이 넘는 그리스교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아시아지역 국가출신 노동자입니다. 저는 2월5일 오전 아주 소박한 성당인 아부다비 성 요셉 주교좌성당에서 가톨릭신자 공동체 대표들과 만났습니다. 만남 후 아부다비 자예드 스포츠시티 경기장에서 모두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4만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가득 찼습니다. 경기장 밖에 세워진 대형 스크린 앞에도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모두 15만 명에 도달했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행복선언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총대주교님들, 상급대주교님들, 주교님들과 공동 집전한 이 미사에서 우리는 특별히 중동과 예멘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특별한 지향을 갖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순방은 하느님의 놀라우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를 찬미합시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들이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신앙과 사랑으로 무장”

교종, 2월 5일 아랍에미리트 15만 군중과 미사봉헌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 5일 UAE 아부다비 자예드 스포츠시티 경기장과 밖에 운집한 15만 신자와 군중 앞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봉헌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가톨릭 교종이 집전한 첫 번째 미사였다. 이로써 종교 간 대화와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와의 만남으로 이뤄진 아랍에미리트 사도적 순방의 막이 내렸다. 미사강론 내용.

“행복하여라!”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분께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주시려는 듯이 반복하시는 후렴이기도 합니다. 곧 만일 당신이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만일 그 당시 제자들처럼 그분의 말씀을 즐겨 듣는다면, 매일 그 말씀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은 행복합니다. 앞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행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삶의 첫 번째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룩해야 할 외적 규정들 목록이나 알아야 할 가르침의 전체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부의 사랑 받는 자녀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의 기쁨을 사는 것이고 삶을 사랑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와 친교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쁨의 이유이며, 세상에서 그 누구도, 어떤 삶의 상황도 우리를 떼어낼 수 없는 기쁨의 이유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평화를 주는 기쁨이요, 영원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행복, 이미 지금 미리 맛보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을 만나는 기쁨 안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려고 왔던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행복하여라!”고 말씀하셨더라도 참된 행복의 각각의 이유가 감명을 줍니다. 참된 행복 안에서 우리는 일반적 사고방식의 전환을 봅니다. 일반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부자, 권력자, 성공한 자, 혹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자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보시기에 행복한 사람은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초라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의로운 자로 남아있는 사람들, 박해 받는 자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옳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이를 깨닫기 위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봅시다. 가진 것 없이 가난하셨지만 사랑으로는 부유하셨던 그분께서는 수많은 생명을 고쳐주셨지만 당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진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의롭고 온유하신 그분께서는 저항으로 맞서지 않으셨고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놓아두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 사랑을 가져오셨습니다. 오로지 그렇게 하심으로써 죽음, 죄, 두려움과 세속을 쳐부수셨습니다. 오로지 하느님 사랑의 힘만으로 이기셨습니다. 오늘 여기서 다 함께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본받으며, 그분과 그분의 겸손한 사랑 외에 다른 것을 찾지 않는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왜냐하면 여기에, 그분과의 친교 안에,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 안에, 지상에서의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저는 우리가 들었던 복음을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글로 써진 복음과 삶으로 살아낸 복음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악보로 써진 음악과 소리로 연주된 음악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복음의 멜로디를 알고 있고 그 리듬의 열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양한 민족, 다양한 언어와 예식을 포함하고 있는 합창단과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하나의 심포니를 이루기 위해 한층 더 조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신앙의 기쁜 다성 음악은 여러분이 모든 이에게 주고 있는 증거며 교회를 건설하는 증거입니다. 힌더 주교님이 자신을 여러분의 목자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모범을 통해 여러분이 종종 그분에게 목자였음을 느낀다고 말씀하셨던 내용은 제게 감명을 줬습니다. 이러한 일에도 감사드립니다! 그럼에도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항상 즐겁게 지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사람, 불의를 겪는 사람, 평화의 일꾼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은 고통을 겪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압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어쩌면 가장 소중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 외에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느끼는 것은 여러분에게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충실하시고 당신의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막 수도생활의 위대한 창시자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성인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사막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끊이지 않는 쓰라린 영적투쟁에 몰입했고, 의혹과 어둠의 공격을 받거나, 심지어 지나간 삶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에 굴복하는 유혹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수많은 고통 후에 주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셨고 성 안토니오는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계셨습니까? 왜 당신께서는 제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에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디에 계셨나요?”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나는 여기 있었단다. 안토니오”(성 안토니오의 생애) 주님께서는 가까이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도 시련이나 힘든 순간 앞에 홀로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분께서는 비록 즉시 개입하시지는 않더라도 우리 곁에서 걸어가시고 만일 우리가 계속 앞으로 나간다면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겁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전문가이시고, 사막에도 길을 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이사 43,19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행복을 사는 것은 눈에 띄는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으셨고 어떠한 장엄한 건물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때 위대한 업적을 일으키거나 특별한 행동을 하면서 눈길을 끌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가능한 모두에게 오직 한 가지 예술작품을 실현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곧 우리 삶이라는 예술작품입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삶의 지도입니다. 초인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본받도록 요구합니다. 마음을 깨끗이 유지하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온유함과 의로움을 실천하고 모두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며, 하느님과 일치하여 고통을 살아가라고 초대합니다. 기적과 비범한 표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성덕입니다. 참된 행복은 초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매일 도전과 시련을 맞닥뜨리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참된 행복을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메마른 땅에서도 매일 나쁜 공기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되돌려주는 나무와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 예수님 안에 뿌리를 잘 내리고, 가까이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선행을 베풀 자세를 갖춘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공동체가 평화의 오아시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저는 두 가지 참된 행복에 관해 짧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공격하거나 정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사라센인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에 대해 가르친 내용을 인용하기를 좋아합니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인간들에게 복종하고(1베드 2,13)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는 모든 사제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전쟁터로 떠났던 반면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인은 오로지 자신의 겸손한 신앙과 구체적인 사랑으로 무장하고 떠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온유함은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방식에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현존의 운하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입니다.

두 번째 참된 행복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부터 시작하여 평화를 증진시킵니다. 묵시록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공동체 가운데 필라델피아 교회가 있는데 여러분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교회와 달리 주님께서 전혀 나무라지 않으셨던 교회입니다. 사실 필라델피아 교회는 그분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고 인내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려움 중에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아울러 한 가지 중요한 면모도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은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형제적 사랑입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형제적 사랑 안에서 인내하는 교회는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평화와 일치를 지키는 은총, 아름다운 형제애와 더불어 서로서로를 돌봐주는 은총을 청합니다. 그 형제애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은 ‘1등급’ ‘2등급’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부르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모든 사람을 향한”(1 테살 3,12) 사랑 안에서 자라면서 낙심하지 않고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은총을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신앙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

교종, 2월 3일 연중 제4주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 3일 연중 제4주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한 가운데에서 ‘예언자들’이 돼야 하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논리를 따르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교종은 삼종기도 후 예멘을 위한 기도를 호소했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로마의 가톨릭 액션단체(ACR) 소년들에게도 인사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주일 전례는 나자렛 회당의 에피소드를 소개했습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한 구절을 읽으셨고 마지막에 그 말씀이 ‘오늘’ 그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님의 성령이 내리신 분으로 소개하셨고 그 성령께서는 당신을 축성하시어 인류를 위한 구원사명을 이루도록 파견하셨다고 소개했습니다. 오늘 복음(루카 4,21-30)은 그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분의 고향사람들이 그 지역의 한 사람, 곧 성부의 파견을 받은 그리스도임을 자처하는 ’요셉의 아들‘(루카 4,22)을 보며 놀라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머릿속과 마음속을 꿰뚫어보실 수 있는 능력을 통해 고향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금세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인근지역에서 행했던 것처럼(루카 4,23 참조) 나자렛에서도 기적을 행하며 그의 이상한 ’주장‘을 증명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계획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행하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을 원하셨고 그들은 표징을 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구원하길 원하셨고,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두 명의 위대한 옛 예언자를 사례로 드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히브리 백성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믿었던 다른 민족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도록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구원의 무상성과 보편성에 마음을 열라는 이 초대 앞에서 고향사람들은 반대했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루카 4,29)할 정도로 공격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처음의 감탄이 그분을 거스르는 공격으로 변했습니다. 이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공적직무가 거부로 시작되고 역설적으로 고향사람들에 의해 가해진 죽음의 위협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부께서 맡기신 사명을 살아가시는 예수님께서는 노고, 거부, 박해와 실패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참된 예언은 값을 치르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혹독한 거부도 예수님을 낙심시키지 않고 그분의 예언활동의 여정과 풍성함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성부의 사랑을 신뢰하시면서 당신의 길을 계속 걸어 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오늘도 주님 제자들안에서 예언자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 소명에 응답하는 데 항구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적 중심주의가 아니라 신앙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특권이나 예외 없이 모든 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 성부의 뜻을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에게 증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분과 똑같은 사도적 열정으로 걸어가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전구를 청합시다.

 

 

“교도소를 구원의 공간으로 만드시오”

교종, 로마 교도소 교도관 직원들에게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 7일 로마 소재 레지나 첼리 교도소장과 직원들을 접견하고 연설했다. 이날 바오로 6세 홀에서 교도소 관계자 6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종은 연설을 통해 교도소가 처벌과 고통의 공간에서 직원들 노력에 따라서는 구원의 공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많은 관심과 인도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해 3월29일 레지나 첼리 교도소를 방문해 재소자들과 교도소 직원들과 함께 주님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한 바 있다. 연설 내용.

잘못을 저질러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어려운 과제에 여기 모인 교도관, 사목자, 교육자, 봉사자 모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도소는 좀 더 인도적인 공간이 돼야 합니다. 저는 교도소가 인간의 사악함으로 만연한 폭력과 불법의 장소로 인식되는 점이 괴롭습니다. 사실 재소자들 중 상당수가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으며 그들을 뒷받침해줄 배경이 전무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보장도, 가족도, 자신의 권리를 지킬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소외되고 버림받았습니다. 사회는 그들을 거북한 사람들, 퇴물, 짐으로 간주합니다. 이런 가운데 여러분들은 인력부족과 만성적인 과밀수용 문제로 고충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과도한 업무, 가족들과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 등이 이미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에 노출된 교도소 업무를 더욱 무겁게 짓누릅니다. 따라서 교도소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개인생활의 균형을 찾고 효과적인 동기부여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교도소 직원들의 도움으로 교도소가 구원과 부활과 삶의 변화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앙, 직업전문교육, 특별히 영적친밀과 연민을 통해 가능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상처 입은 형제에게 손을 내미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본받아 행동한다면 그리스도 사랑에 근거한 친밀의 자세를 통해 재소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과 자각, 믿음을 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화합과 일치의 정신을 바탕으로 교정 업무에 임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모두 함께 한 방향으로 행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악의 덫에 걸려 넘어진 이들로 하여금 다시 희망 안에서 성장하고 두 발로 설 수 있게 돕도록 말입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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