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시 - 박춘식]

애벌레 (이미지 출처 = Pixabay)

애벌레의 연두색 꿈

- 닐숨 박춘식

 

- 저승 대문에 들어서니까 - 저를 아는 분은 - ‘야고보가 드디어 왔구나’ - 저를 모르는 분은 ‘애벌레 한 마리가 또 올라왔구나’ - 하시며 큰 죄인을 반갑게 맞아줍니다 - 저는 ‘이승의 사람은 벌갱이’라고 늘 생각했기 때문에 - 마중 나온 분들을 살펴보니까 - 보일 듯 말 듯 - 하얀빛 날개로 미끄러지듯 다닙니다 -

 

- 하늘 한구석에서 - 어둠을 씻으며 - ‘이왕이면 연두색 날개라면 좋겠는데’ - 중얼거리니까 - 어느새 제 앞에 자줏빛 날개를 들고 있는 천사가 - 빙긋 웃습니다 - 이승을 벗어나서도 이승처럼 ‘욕심’을 쥐고 있었구나 - 하며 너무 부끄러워 - 난로 위 오징어처럼 - 몸이 돌돌 말리고 - 한숨을 푸 내쉬는데 - 따르릉 탁상시계가 저를 쿡쿡 쑤셔 댑니다 -

 

뒤 뜰 감나무에 남겨둔 예닐곱 홍시를 보며

저승을 생각하기 전에 이승의 작은 열매라도

몇 개 만들어 두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홍시 같은 령시(靈詩) 몇 편이라도 남기면 어떨까요

늦가을 새큼한 바람에게 여쭈어봅니다

 

<출처> 닐숨 박춘식 미발표 시(2018년 11월 19일 월요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얼추 셈하듯 많이 알 수 없지만, 물질을 벗어나는 영계(靈界)에서는 이승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게 된다는 정도는 신자라면 다 알고 있으리라 여깁니다. 그래서 이승의 사람은 천사가 되기 전의 애벌레라는 생각을 (제 혼자 생각으로) 자주 하였습니다. 탈피의 과정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 등급의 천사들이 있다는 신학자들의 말을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 여러 과정을 거치는 천사도 창조하실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면, 바로 우리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시작(詩作)을 위한 사색으로 가끔 해 봅니다. 초자연적인 상황을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시인이라면 여러 층층으로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의 범위가 신앙에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도 많은 이들이 잘 아시리라 여깁니다. 연옥 영혼을 매일 생각하고 기도로 힘껏 도와주는 11월, 그리고 위령 성월이 아니더라도 저승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바치신다면, 연옥에 계시는 분들이 줄줄이 기도 힘을 얻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닐숨 박춘식
1938년 경북 칠곡 출생
시집 ‘어머니 하느님’ 상재로 2008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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