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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을까[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덥습니다. 이 더위 속 밖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들과 열기를 피할 수 없어 고통받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좀 더 참자 하다가도, 지구 온난화의 책임을 곱씹으며 보속이라 바치다가도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은 순간들이 자꾸 찾아옵니다. 치약도 뜨거워지고 문 손잡이도 달궈진 수녀원 복도 창문에 작렬하는 태양 빛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그리스 신화 ‘이카루스의 추락’이 떠올랐습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는 다이달로스가 왕을 기만한 죄로 갇혀 모든 퇴로가 차단된 미로 감옥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방법으로 탈출합니다. 당시 뛰어난 장인이자 발명가였던 다이달로스는 깃털을 모아 밀랍을 녹여 붙인 날개를 아들에게 달아 주면서 말합니다. 너무 낮게 날면 바닷물의 습기 때문에 날개가 무거워지고,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 때문에 밀랍이 녹아 추락할 것이니 조심하라고. 막상 날아오르자 이카루스는 신이 된 듯 기뻐 태양에 더 가까이 날아 오릅니다. 밀랍이 녹기 시작하자 날개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양력을 잃은 이카루스는 아버지가 말릴 수도 없이 바다에 추락해 죽고 맙니다.

(그림 1) '이카루스의 추락', 마르크 샤갈. (1975) (이미지 출처 = 파리 퐁피두 센터 홈페이지)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다양한 해석과 표현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 중 마르크 샤갈은 특유의 떠오르는 사람과 사물들의 표현 방식을 그 반대로 사용하여 추락하는 이카루스를 그렸습니다.(그림1) 땅에 있는 모두가 이카루스의 추락을 바라봅니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 아이들, 동네 사람들이 나와 올려다보고 있는 이 장면은 사건이 갖는 비극성보다는 이를 목격하고 있는 이들의 일상성에 더 주목하게 합니다. 오히려 이카루스는 추락을 통해 보통 사람의 일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일까, 질문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그림 2)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피터르 브뤼헐. (1558) (이미지 출처 = 벨기에 왕립 미술관 홈페이지)

이런 면에서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은 그 반대의 상황을 전합니다. (그림2) 제목의 중심이 ‘풍경’에 있음이 힌트를 줍니다. 한눈으로 보아 어디에서도 이카루스나 그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추락’임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샅샅이 살펴보면 그림 오른편 아래 물 속에 거꾸로 처박힌 사람의 다리가 작게 보입니다. 제목에 비추어 보아야 방금 추락한 이카루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그림 전체를 보면, 전면에 가장 크게 보이는 밭을 갈고 있는 농부도, 그 뒤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목동도, 심지어 물에 빠진 이카루스의 근처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도 이 비극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채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냥 보아서는 심지어 해변 마을을 목가적으로 묘사한 풍경화라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은 브뤼헐이 템페라화로 그린 원본을 제작한 뒤 얼마 있지 않아 유화로 복제한 작품이라 합니다. 원화로 추정되는 그림과 거의 동일하지만 단 하나의 차이는 원화에서 목동이 올려다보는 하늘 방향에 다이달로스가 그려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이달로스가 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상태에서 아들의 추락을 말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모습이 복제 과정에서 생략되면서 이카루스의 추락은 풍경 속으로 더욱 숨어 버렸습니다.

열풍과 열기 속에서 떠오른 이 이야기와 그림들 사이에서 하게 되었던 묵상은 창세기의 ‘보시니 좋았다’였습니다. 온 세상을 만들어 가시며 좋아서 감탄하셨던 하느님, 그 조화롭고 감탄스러운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를 인간에게 맡기신 하느님. 우주의 나이를 두고 볼 때 인간이 존재한 시간은 너무나 짧고, 인간이 알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우주도 지극히 일부, 그 중 아직은 지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맡기신 이 짧은 시간과 작은 공간에서 인간은 얼마나 지구를 소유하고, 소모하며, 소진하고 있는가, 자문하게 됩니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구는 끝없는 소비를 위한 끝없는 재화이자 공장이고 쓰레기장이 되었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한 근본적 형질의 변형들은 이 소진의 과정을 더욱 일그러지게 만듭니다. 윤리적 고려를 한참 앞질러 가는 기술의 상업적 발전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들을 도구화합니다. 지구는 인간으로 인해 사멸해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우주의 악당들이 이런 지구인들을 멸망시키겠다는 당당한 근거를 가지고 등장하나 봅니다.

브뤼헐의 그림에 빗대어 보면 인류의 끝없을 것 같던 영광은 물에 빠지는 연약한 다리 한 쌍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우주의 질서는 그 일상성을 잃지 않은 채 이어집니다. 한편으로 샤갈의 그림에서 묵상하며 찾아볼 수 있는 희망은 커다랗게 떨어지고 있는 이카루스와 이를 받칠 듯 모여든 마을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혹시, 이 추락은 우리를 다시 우주의 질서 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정으로 이끌어 주는 죽음이 아닐까. 내 개인의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 국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 하시던 그 세상의 조화 속으로 다시 참여할 수 있는 죽음의 시간이 지금이라면! 열기 속 희망을 가지고 생각해 봅니다. 조금만 더 불타고, 그래서 이 불볕 속에 우리의 오만한 비극들을 가능하게 한 욕망이라는 밀랍이 녹아 버리고, 그 허망한 깃털들이 다 날아가 버린다면. 우리의 맨몸뚱이가 다시 땅에 닿아 지구와 우주의 형제들과 조화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을 회개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가 무엇에 죽어야 하는지를 이 열기 속에서 기도하며 하느님께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습니다. 원래 자기 것이 아니니까요.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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