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스산하고 기괴한 마을, 한 소년의 죽음, 살인자로 몰려 쫓겨난 소녀, 그리고 성인이 되어 마을에 돌아온 그녀의 복수. 스릴러물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한 이 요소들은 2015년 개봉한 영화 '드레스 메이커'(조셀린 무어하우스 감독)의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다양한 은유를 통한 이야깃거리가 많은 이 영화에서 제게 며칠이고 남아 있던 장면은 과거 회상으로 나오는 마을 아이들의 잔인한 놀이와 교실 상황이었습니다. 동급생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소년과 이를 도와주거나 방조하는 다수의 아이들, 그리고 그 소년이 자초한 죽음을 가장 괴롭힘당하던 소녀에게 뒤집어씌워 내쫓는 마을 사람들. 이 소년은 작은 악마같이 묘사되긴 합니다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가정 내, 이웃간 은밀하게 저질러지던 각종 폭력의 실상이 오히려 아이들의 잔인함을 설명해 줍니다. 아이들의 인성이 그 사회의 가치와 구조를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를 통틀어 변화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 폭력이 행해지는 구체적 장소가 마을 내 유일한 작은 학교라는 묘사는 교육의 자리를 볼 수밖에 없게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한 예로 떠오른 '학폭'(학교 폭력)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학교생활의 주요 용어 중 하나가 되었고 언제부터 아동, 청소년 범죄의 잔혹함이 주요 뉴스 한 켠을 차지하게 되었는가를 짚어 봅니다. 사회가 병들수록, 즉,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자신과 타인에게 폭력적이 되고 이들이 구성하는 사회의 원리가 욕망과 겉치레로 점철될수록 이 공동체의 양분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통해 사회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일 뿐, 악한 아이들이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폭력’이라 붙이고 이를 처벌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해결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몸통과 줄기, 원인과 현상, 구조와 표면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그림 1) '오스고르스트란의 거리', 에드바르 뭉크. (1901-03) (이미지 출처 = 노르웨이 베르겐 코드 미술관 라스무스 메이어 컬렉션 홈페이지)

뭉크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마을이 제목인 이 그림에서 한 소녀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구도를 따라 왼편 길을 바라보면 얼굴이 분명치 않은 세 명의 남자아이가 엎드려 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길 멀리 뒷편 어른으로 보이는 둘은 이 상황을 바라보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은 소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고 그 모습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는 채 느끼게 되는 이 긴장을 그의 작품 맥락에서 좀 더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림 2) '절규', 에드바르 뭉크. (1893) (이미지 출처 =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홈페이지)

사람의 형상이 핏빛 하늘과 검은 강물의 출렁이는 선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공포에 가득 찬 소리는 그 선 속으로 삼켜져 버린 듯한 ‘절규’는 뭉크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이자 그가 실제로 친구들(왼편 뒤의 두 사람)과 다리를 건너가다가 혼자 갑자기 느꼈던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미술사적으로 ‘표현주의’에 속하는 뭉크는 자신의 내면과 인간 보편의 주요 주제들을 직접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써 보는 이가 함께 느끼고 생각하길 바랐습니다. ‘절규’는 홀로 느끼는 공포와 절망, 우울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절박함과 그것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고 싸우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로 표현 재료를 달리하면서 수십 장의 거의 동일한 그림을 재제작한 사실을 통해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그의 표현 방식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정면 주요 인물의 뒷배경이 단지 장소가 아니라 그 인물의 정서적 맥락이자 메아리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혼자 동떨어져 소리 지르는 듯하지만 그 비명의 이유는 이를 둘러싼 세상 속에 있고 그 세상 속에 침묵으로 울려 퍼집니다. <그림1>의 소녀를 마주하며 함께 느끼게 되는 불안을 그 뒤 배경과 함께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림 3) '불안', 에드바르 뭉크. (1984) (이미지 출처 =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 미술관 홈페이지)

‘불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요소들이 좀 더 직설적으로 장면 구성에 쓰이고 있습니다. 잘 차려입었지만 시퍼렇게 죽은 얼굴을 한 어른들의 행렬 끝에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와 눈을 마주하게 됩니다. 역시나 핏빛 하늘과 검은 땅과 물이 강렬한 정서를 전달하지만 여기서는 전체 대각 구도의 반을 차지하는 좀비 같은 이들의 행렬이 좀 더 구체적 설명을 제시하며 소녀 얼굴에 가득한 불안은 단지 개인의 정서내적 문제가 아닌 이 공포스런 바탕에 기인한다고. 우리 아이들이 겪는 불안과 무감각하게 자행되는 폭력적 말과 행동, 좌절과 무기력을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떠올립니다. 생명력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생명이 그답게 살아나도록 하지 못하는 이 사회 그 끝자락에서 자라느라 고군분투하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이 그림에서 알아보게 되는 것은 과한 비유일까요.

드러나는 현상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을 문제로 다루는 것이 마치 해결처럼 여겨집니다. 앞서 예로 든 ‘학폭'(학교 폭력)이란 이름을 붙인 자리들은 과연 우리 아이들의 문제일까요. 그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 처벌하면 근본 문제의 자리가 회복되는 걸까요. 문제의 원인이 아닌 현상들을 쫓아다니는 동안 더 깊이 곪아 가는 원인의 자리들을 언제까지 새로운 겉모양으로 덮어 놓을 수 있을까요. 보려 하지 않거나 보지 않으면 괜찮은 것처럼 살아온 자리들에서 고통받는 것은 거기에서 자라야 할 새 생명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말 ‘본다’는 것은 문제의 실체를 직면하고 그에 따른 정직하고 아픈 새로 나기의 과정을 인내로 가는 것을 포함할 것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좀 더 덧붙이자면, 자신에게 마을의 죄악을 뒤집어씌워 ‘저주받은 아이’라는 낙인과 함께 내쫓은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와 그들이 원하는 화려한 옷들을 지어 주며 빈약하고 부조리한 내면이 더욱 부각되게 했던 여주인공은 마지막에 자신의 어린 시절 집을 포함한 마을을 모두 불태워 그 앙상하고 빈약한 내부가 검게 드러나 무너지게 합니다. 그리고 ‘저주’에서 풀려나 자신의 길을 떠납니다. 뭉크의 그림 ‘불안’에서 소녀의 머리 위 불타는 하늘이 단지 불안의 표현만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하늘나라는 이 아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다.'(마태 19,1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니다.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 기도하며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엄중한 책임과 함께.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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