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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최근 주중 미사 독서에서 연이어 '코헬렛'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례력상 시기가 돌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문득 세상이 “허무로다 허무!”(1,2) 하는 코헬렛의 외침이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하게 들리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헬렛 전권을 다시 읽으며 묵상해 보았습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12,1a) 코헬렛은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회중을 모으는 사람', 혹은 '설교자'를 의미하는데, 기원전 3세기경 익명의 현인이 인간사의 경험을 광범위하게 탐구한 끝에 적은 것이라 합니다.('가톨릭 전례 사전' 참조) 살아 보고바, 겪어 보며 깨닫게 된 바를 나누는 코헬렛의 이야기가 우선 와닿는 것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어 가는 나이, '젊음의 날'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고 했던 노래 가사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와는 다른 결이었습니다. 세상의 허무함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의미인지 아직 분별하지 못하는 채 의미들을 찾고자, 그 의미들로 삶을 채우고자 긴장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렇게 쉽게 허무라고 이야기하는 코헬렛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제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과 반감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길도 그랬습니다. '내가' 찾는 의미 안에 하느님도 포함되셔야 했고 그것으로 생은 조금씩 차올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그 허무의 외침이 하느님을 향해 기쁘게 팔을 벌리는 것임을 이번 코헬렛 독서를 통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저의 '젊은 날'이 끝나 가긴 하나 봅니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지나가야 알게 되는 것, 그러면서야 삶의 모양새 면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러면서야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게 되는 이 원리를 그렸던 그림들이 떠올랐습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바니타스(Vanitas) 정물' 양식이 있었습니다. '허무'(vanity)의 라틴어형인 이 양식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성경의 코헬렛에서 따온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기 인간의 지적이고 창조적 힘을 부흥시키며 한껏 꽃피었던 예술계는 17세기에 접어들며 그 뒤에 다가오는 인간사의 새로운 면을 알아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하느님 안에서 생의 의미를 다시 찾고자 했던 칼뱅주의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당대 미술가들은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3,1)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3,11)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양한 상징을 통해 그림에 담았습니다. 이 화풍을 대표하던 이들 중 네덜란드 화가 얀 다비츠 데 헤엠(Jan Davidsz. de Heem, 1606-83)이 있었습니다. 정물 중에서도 '꽃'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재능이 특출했던 얀 데 헤엠은 자신의 장점을 특징으로 삼아 이 양식 속에 녹여냈습니다. 더 생생하게 아름다울수록 그것이 하느님의 시간 안에 놓여 있음을 전달하는 힘은 컸습니다.

(그림1) '탁자 위의 정물', 얀 다비츠 데 헤엠. (제작 연도 미상) (이미지 출처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국립미술관)

탐스러운 과일을 담고 있었을 반짝이는 은식기는 그 바닥을 보이며 쓰러져 있습니다. 먹음직스러웠을 굴은 상해 버렸고 껍질을 벗기다 만 오렌지는 바짝 말랐습니다. 사람들을 흥이 나도록 해 줬을 술잔의 술들은 마시다 만 채로 남겨져 있고 탁자 끝 모서리에 위태롭게 얹힌 시계는 이 모든 것의 시간이 다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파란 천으로 연결되어 묶인 열쇠는 이 시간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뜻합니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12,6-7)

(그림2) '해골과 책과 장미가 있는 정물', 얀 다비츠 데 헤엠. (1630) (이미지 출처 =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박물관)

그가 젊을 때 그렸던 그림은 좀 더 직설적이었습니다. 바니타스 정물 양식에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 해골과 그의 특기였던 아름다운 장미꽃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오른편에 놓인 봉오리에서 만개한 장미로, 그리고 해골로 이어지는 구도는 왼편에 펼치다 만 두터운 책으로 시선을 이어가게 합니다. 삶 자체를 의미할 수도, 성경을 의미할 수도 있는 이 책 뒤 그늘에는 타다 꺼진 초가 있습니다. 곧 그 불이 꺼져 버릴 삶의 유한함에서 그 앞에 놓인 십자가 문양을 통해 상징하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한 영원한 희망으로 우리의 시선이 옮겨 가길 바라는 표현입니다.

(그림3) '책과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 얀 다비츠 데 헤엠. (1625-30) (이미지 출처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나는 지혜와 지식, 우둔과 우매를 깨치려고 내 마음을 쏟았다. 그러나 이 또한 바람을 붙잡는 일임을 깨달았다.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을 늘리면 근심도 늘기 때문이다.”(1,17-18)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던 코헬렛은 다음과 같이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 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12,13) 차분한 갈색조의 그림 속 한때 아름다운 운율과 함께 인생을 노래했을 류트는 뒤집힌 채 벽에 세워져 있습니다. 책상 가득한 책들과 기록들은 이제 그 내용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듯 덩어리로 엉켜 있습니다. 그중 한 장이 빠져나와 끄트머리에 쓰인 것을 읽어 볼 수 있도록 펼쳐 있습니다. 크고 분명한 글씨입니다. 'finis'(fine, 끝). 더 이상의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마음껏, 풍성하게 표현함으로써 그 의미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코헬렛의 12장에 걸친 인생사 허무함의 외침은 되려 우리 삶의 면면을 살뜰하게 돌아보며 하느님을 향하도록 초대합니다. 무엇이 허무인지를 알 때 무엇이 의미인지를 알게 되는 자유가 있음을 조금씩 발견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지속됨을 알았다. 거기에 더 보탤 것도 없고 거기에서 더 뺄 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니 그분을 경외할 수밖에.”(3,14)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지기 전에 나의 창조주를 기억할 수 있기를 오늘 청합니다. 나의 '아직' 젊은 날에.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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