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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나요[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얘, 잠깐만. 너 어디 아프니?” 
“어…. 아뇨.” 
“얼굴이 왜 그러냐.” 
“....” 
“밥은 먹었냐?” 
“....” 
“잠은?” 
“별로 안 잤어요.”
“얼마나 잤어?” 
“어.... 제가.... 잠을 잘 못 자서요.” 
“몇 시에 자는데.”
“한.... 3시나 4시? 정도요.” 
“참 내.... 그럼 밥은. 밥은 어떻게 먹어. 잘 챙겨 먹냐?” 
“어.... 하루에 한 끼 정도 먹어요. 학교 와서. 점심이나 저녁이요.”
“이 사람아, 그렇게 먹고 어디서 힘이 나냐! 그러고 그렇게 조금 자거나 못 자면 어떻게 밥맛이 있겠냐!” 
“헤....”

학부 강의 끝에 레포트를 제출하고 가는 학생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이번 수업 시간 내내 유난히 맥을 못 추고 자꾸 엎드려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수업하는 동안 걱정이 되었습니다. 학기 초만 해도 초롱초롱하던 아이가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시들어 있었습니다. 딱히 중간고사 때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너 학기 초에는 눈빛이 얼마나 또렷했는데 오늘 보니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어디 아프거나 무슨 일 있나 싶어 물어본 거야.” 
“아.... 몰랐어요. 제가 그런 줄.” 
“근데 너 뭣보다도 그렇게 안 먹고 안 자면 축나서 못 해. 네 전공 ○○도 얼마나 체력이 필요한데 지금은 우선 버틸 순 있어도 조금만 더 지나면 너무 힘들어서 안 돼.” 
“네.... 근데 밥은요, 그 이상은 먹고 싶단 생각이 안 들어요.”

저는 고등학교에서도 한 그룹의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합니다. 이번 학기 새로 참여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른 무엇보다 간식을 잘 챙겨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거의 1년간 너무 안 먹어서 몸에 이상이 생긴 상태라는 이야기를 상담 선생님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수업 한 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매우 명석한 이 친구는 또렷한 눈빛에 비해 몸이 금방 무너질 듯 힘이 없고 약한 상태였습니다. 오래 먹지 않았더니 먹고 싶지 않아졌고, 어느 날은 하루가 끝날 때 보니 종일 물 한 모금 안 마신 날도 있었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학원 간다고 저녁 밥을 과자로 때우는 한 학년 후배에게 잘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먹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의식적으로 영양을 생각하며 챙겨 먹으려 하고 있다 했습니다. 집안에 큰 어려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삶의 의지를 한 번 다 내려 놓았던 아이는 이제 무언가 다시 시작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예산을 끌어다 열심히 사다 먹이는 만큼 잘 먹고 힘내려는 아이가 고마웠습니다.

유학 중에 너무 힘든 날이 있었습니다. 미사에 갔지만 어차피 영어는 집중 안 하면 잘 들리지 않았으므로 멍하니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독서 중 갑자기 뭔가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Get up and eat!”(일어나서 먹어라! 1열왕 19,5)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들렸습니다. “Get up and eat or the journey will be too much for you!"(일어나서 먹어라, 안 그러면 네가 가야 할 여정이 너무 힘들 것이다! 1열왕 19,7) 그날 강론에서 신부님은 이것이 우리에게 성체성사의 의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몸과 피를 먹고 우리는 그 힘으로 이 고된 삶의 여정을 가는 것이라고요. 그날 수첩에 “Get up and eat!” 하고 연필로 크게 적어 놓은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도 모르는 새 힘이 어디선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뭔지 모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미사를 마치고 나와서 사 먹은 소박한 점심이 감사하고 맛있었던 기억도 납니다.

'엘리야를 깨우는 천사', 마르크 샤갈, 1958. (이미지 출처 = 뉴욕 유대인 박물관 홈페이지)

그림 속 누워서 자고 있는 할아버지는 엘리야입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전 계층에 걸쳐 일상이 된 우상숭배가 가장 극심했던 아합 왕 시대, 모든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제단을 다시 고쳐 쌓고 바알 예언자들과 1:1000 정도로 맞붙어 하느님만이 주님이심을 증명하고 그들을 전멸시킨 위업을 달성한 뒤 왕비 이제벨의 살해 협박에 두려움에 가득 차 도망쳤던 이 대예언자는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뻗어 버립니다. 그러고는 “저는 저희 조상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인간입니다. 주님, 이제 충분하니 절 죽여 주십시오.” 하고 잠이 듭니다. 이런 엘리야를 천사가 깨웁니다. 샤갈은 천사가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로 엘리야를 깨우는 순간을 담음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를 존중하고 아끼시는 방식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색의 절제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천사의 몸에 가득한 노란 색으로, 엘리야에게 새롭게 차오르는 힘을 녹색으로 표현합니다. 둘 다 새 힘을 의미하지만 ‘몸’에 새 힘을 얻어야 하는 땅의 존재, 인간의 조건을 표현한 구분이기도 합니다. 머리맡에는 물과 빵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먹고 자고, 또 일어나 먹고 잔 엘리야는 새 힘을 얻어 사십 일을 달려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신이 어느새 규정하게 된 막강한 권능의 하느님이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을 만납니다.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그리고 본래의 자리로 새로운 파견을 받습니다.

'엘리야를 이끄는 천사', 마르크 샤갈, 1958 추정. (이미지 출처 =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홈페이지)

온몸이 하느님이 주신 새 힘 노란 빛으로 가득 찬 엘리야가 천사를 따라갑니다. 엘리야를 이끌고 가는 천사의 다리는 굳건하고 날개는 크고 힘 있어 보입니다. 몇 개인지 모를 팔의 대부분이 엘리야의 팔을 잡고 엘리야 역시 단단히 마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얼굴은, 몸의 방향과 정반대로 엘리야를 향해 있습니다. 어떤 길이 되든지 간에 온전히 엘리야를 보살피며 이끌어 주실 하느님의 약속으로 보입니다. 마주보는 천사의 얼굴에 어느새 깃든 초록은 엘리야에게 쉼과 먹을 것을 통해 일어날 힘을 주셨던 하느님의 돌보심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게 합니다. 엘리야는 ‘예언자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사람은 먹고 자야 합니다. 청년과 청소년들이 ‘먹고 자는 것’이 사람에게 중요함을 모르는 것은, 이 사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목적을 생각해 보고, 남을 위해 투신하고, 하느님을 찾는 이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다른 요구를 하기 전에 잘 먹고 잘 자는지를 묻고, 그 ‘먹고 자는 것’의 중요성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한 해가 다르게 깨닫게 됩니다. 먹고 잘 줄도 모르는데 영적으로 먹고 쉬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함께 영육 간에 돌보아야 할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께 이야기할 바탕도 없습니다.

수업 뒤에 붙잡아 세웠던 학부생과의 대화 끄트머리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전령 천사가 아니므로 급한 대로 제 식의 뭔가를 해야 했습니다.

“너, 잠이 드는 가장 좋은 방법 알려 줄까?” 

듣는 학생의 눈이 커졌습니다.

“어? 네!”  
“누워서 책을 봐.” 
“으흐하하하!”

아이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누워서 책 들고 읽기 시작하잖아? 책장 넘기기 전에 바로 잠든다.” 
“으하하, 네, 네.” 
“근데 한 가지, 무거운 책을 들면 안 돼.” 
“아하, 네. 손에서 떨어뜨리면 아프니까요.” 
“그렇지, 잘 아네. 그리고 혹시 뭐 잠이 금방 안 들면 이 참에 안 읽던 책도 읽고 좋지 뭐. 근데 백발백중 금방 잔다. 잠 안 온다고 핸드폰이나 이런 거 보지 말고. 더 각성돼서 못 자.” 
“아.... 맞아요. 네, 그래 볼게요.“

다음 시간에 만나면 좀 잤는지 물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두 끼는 먹어 보는 방향으로 이야기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이웃에 대해, 삶의 의미에 대해 깨어 보자, 좀 더 깊이 걸어가 보자 제안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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