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6월 17일(연중 제11주일) 마르 4,26-34

비유들은 하느님나라를 더 가까이 오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더 노력하게 만드는 대조법들이다.

주님께서 일하신다

대조법은 어떤 알려지고 익숙한 것을 사용하여 포착하기 어려운 실제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와 같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예수님의 비유에 있어 큰 원천이다. 오늘 마르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들을 보면, 하느님나라를 농촌 언어로 표현한다. 첫 번째 비유는 흙의 힘과 풍부함을 농부의 노고와 대조시킨다. 농부들이 무엇을 하든, 자든 깨어 있든 간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난다.”(마르 4,27) 씨앗 안에는, 그것을 처음에는 줄기로 바꾸고 그 다음에는 이삭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밀 낟알로 바꾸게 하는 힘이 있다.(4,28)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완전히 알게 된다. 밀로 빵을 만들고, 인간의 생명에 기본으로 필요한 일상 음식을 만든다. 예수님은 낟알의 생명을 갖고 있는 씨앗을 하느님나라의 기본 요소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그것은 선물이다. 하느님이 주된 농부이고 우리들은 그저 그분의 조수들이다.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기여는 올바른 자리를 잡지 못한다.

하느님과 함께, 우리는 추수가 다가옴을 기뻐할 것이다.(4,29) 수확의 때는 주님의 심판의 때다. 그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나서야 할 것이다.”(2코린 5,10) 하느님나라를 맞아들이는 것, 사랑, 정의 그리고 자유의 메시지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역사의 주재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나무 (이미지 출처 = Pixabay)

새들의 보금자리

두 번째 비유는 하느님나라의 확실한 작음을 다루고 있는 비유다. 그러므로 큰 위험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대조법은 농촌 세상으로부터 온다. 겨자씨는 별로 보이지 않으나, 그 안에 큰 나무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보금자리를 짓고 그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마르 4,31-32) 하느님나라도 그와 같다. 시작은 다가올 모든 것을 선포하지 않는다. 처음에 하느님나라는 별로 가치가 없는 갈릴래아에서 선포된다. 그 선포자는 당대의 권력가들을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처했다. 아무도 그분이 말했고 행했던 것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씨앗은 역사 속에 심어졌고, 나무는 계속해서 자라고 있다. 항상 보잘것없지만 활력 있게 푸르게 자라난다.(에제 17,24)

씨앗의 열매들은 아이린 맥코맥 수녀 같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발견된다. 그는 호주에서 태어난 수녀였다. 그는 살해되기 위하여 페루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명, 우정, 일, 그리고 매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왔다. 그는 평화로운 나라, 중대한 문제가 없는 나라에서 왔다. 그럼에도 그는, 생명을 표현하기 위하여 점점 더 오직 그들 자신의 죽음이라는 방식밖에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주님께서는 아이린을 통하여 하느님나라의 씨앗을 자라나게 하셨다. 그가 일어나 침대로 갈 때, 밤이나, 낮이나, 하느님나라는 그의 삶 속에서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힘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여성으로서 수도자로서 그의 위치는 항상 소외되었다. 그러나 그는 보잘것없는 겨자씨의 좋은 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의 겸손을 변화시키어 우리에게 그늘을 주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그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풍부한 나무가 되게 하신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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