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노 추기경과 프란치스코 교황

그는 이제 나이가 90살이다. 그리고 그가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체계적으로 굳혀 온 개인적 권력은 1990년대 초에 정점에 이르렀었는데, 시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 30년간 그는 교황청에서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가 받든 교황들조차 조심스레 그의 동의를 얻어냈다. 교황청의 모든 직급에 걸쳐 있는 많은 핵심 인물들로부터 그가 얻은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안젤로 소다노. 현직 추기경단 단장이자 전 국무원총리다.

현재 칠레에서 진행되고 있는 성직자 성학대와 교회가 그것을 덮으려 했다는 추문으로, 그가 오랫동안 교황청의 막후 인물로서 지배해 온 시절은 분명히 끝나가는 것 같다. 그는 1978-88년에 칠레 주재 교황청대사를 지냈다.(편집자 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7년에 칠레를 방문했는데, 이듬해인 1988년에 소다노를 교황청 국무원의 외무장관에 임명한 뒤 다시 1990년에 국무원총리로 승진시켰다.)

하지만 그가 교회와 그 제도적 구조에 남긴 뚜렷한- 그리고 늘 긍정적이지는 않은- 자취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교황청의 직업외교관으로서 오랫동안 비범하게 헌신했다.

그의 권력과 영향력이 특히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한 사건을 보면, 이는 지난 2006년 6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소다노 추기경(교황보다 겨우 7달 더 나이가 많다)을 은퇴시키고 국무원총리(당시에는 국무원장이라고 했다) 자리를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에게 준다고 발표했다. 베르토네 추기경은 교황이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에 밑에 있던 믿음직한 보좌였다. 비록 실제 자리 바뀜은 세 달 뒤인 9월 15일에야 이뤄졌지만, 베네딕토 교황이 소다노 추기경을 내침으로써 자신의 교황직에 느리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던 것은 2006년의 이 여름날이었다(물론 이론의 여지는 있다).

그러자 1990년 12월부터 국무원총리를 맡아 온 당시 78살의 이 이탈리아인은 베네딕토 교황이 교황청의 조직구조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이 2인자 자리에 베르토네를 선택한 것을 단념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실제로 은퇴하기 전의 몇 주간, 그는 베네딕토 교황에게 살레시오회 소속으로 평범한 교회법 학자인 베르토네는 국무원총리에 맞지 않으므로 포기하고 대신에 고참 외교관을 뽑으라고 권했다. 그가 내민 후보자 명단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시 외무장관이던 조반니 라졸로 대주교다.

라졸로는 소다노가 신뢰하는 동맹자이자 그와 같은 이탈리아 북부 피드몬트 지방 출신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소다노와 마찬가지로 교황청 외교관으로서 독일 주재 교황대사(1995-2003)를 지냈고, 베네딕토 교황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하는데, 이는 소다노가 보기에 베네딕토 교황이 그를 국무원총리로 받아들이기에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 바바리아 출신인 베네딕토 교황은 소다노 추기경의 권고를 거절하고 베르토네의 임명을 고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교황청 안에 있는 교황청 외교관 대부분의 중요한 지지를 잃었다. 이들은 소다노 추기경의 명에 움직였는데, 소다노 추기경은 베네딕토 교황이 외교관 출신이 아닌 베르토네를 선택함으로써 이들을 소외시켰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편집자 주- 국무원에는 국무부와 외무부의 두 부서가 있어서, 교황청 외교관들이 소속돼 있다.)

교황이 된 지 겨우 14달 만에, 베네딕토 16세는 커다란 전술적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이 지점부터 그의 교황직 수행은 큰 위기를 잇달아 맞으며 비틀거렸다. 바티칸 내부의 위기도 있었고, 세계 무대에서의 위기도 있었다. 그리고 거의 8년에 가까운 고뇌에 찬 시간이 흘렀을 때, 베네딕토 교황과, 그가 신뢰하는 주변의 소수의 보좌진들은 (다른 교황청 관리들에게서) 아주 소외된 상태였다. 이 모든 것에 직면하여, 나이든 이 신학자 교황은 사임했다.(2013년 2월 28일)

2016년 3월,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모습.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고전적 교회인과 제도의 수호자

하지만 소다노(와 그의 세력)는 남았고, 2013년에 열린 교황선출회의(콘클라베)에 참여했다. 그는 추기경단 단장이었으므로 콘클라베 전에 열리는 (콘클라베 참석자들이 모이는) 토론회들을 주재하고, 콘클라베 전에 열리는 미사를 집전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투표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그는 많은 추기경들을 설득시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예수회)에게 표를 던지도록 한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가 현 교황 프란치스코다.

소다노가 동원한 표가 아르헨티나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선에 결정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표들이 긴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 당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도 잘 알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소다노가 로마 교황청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온전히 아는 상태에서 교황직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이 전직 국무원 총리가 누구를 상주고 누구를 벌줄지에 대해 강철 같은 의지를 갖고 있음을 개인적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교황 자신의 출신지인 남미에 대해 그랬는데, 남미에서는 적어도 1970년대 이후로는 (교회의) 정책 결정과 주교 임명이 소다노가 끼지 않고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전혀 의심할 바 없이, 남미주교회의(CELAM)의 1992년 산토도밍고 회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억에 화려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 보좌주교로 서품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던 그는 소다노 추기경이 (그의 칠레인 부하, 미래의 호르헤 메디나 에스테베스 추기경과 함께) 남미 주교들을 마구 짓밟고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 모임의 최종성명 내용을 마음대로 지시하려 했던 것을 지켜봤다.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에게는 자신의 고국인 이탈리아 말고는 남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땅일 것이다. 그가 교황청을 위해 50년을 넘게 일하는 동안, 외교관으로 해외에 파견된 곳은 남미뿐이었다. 사제 외교관으로서 처음 파견된 것은 에콰도르였고(1961-63), 이어 우루과이(1963-65)와 칠레(1965-67)를 거쳤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와 국무원에서 10년을 보낸 뒤, 1978년 초에 다시 칠레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교황대사로서 새로이 주교품을 받은 상태였고, 이로부터 10년을 칠레 주재 교황대사로 지낸다.

약 한 달 전에 내가 이 자리에 썼던 것처럼, 소다노 추기경은 “칠레의 주교 지도부를 형성하는 데 그 어느 교황청 관리보다 더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

호르헤 메니나 추기경(메디나의 친구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즉 베네딕토 16세에게 던져진 쓸모 있는 흥정용 칩)의 부상에서부터 후안 바로스 주교의 승진에 이르기까지 소다노의 지문은 어디에나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역할은 그가 칠레 주재 교황대사로 산티아고에서의 임기를 마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국무원총리가 되자, 소다노는 주교성 위원으로서 칠레(그리고 다른 곳)의 주교 임명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2007년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그가 영향력을 행사한 주교 임명에는 현 칠레 주재 교황대사인 이보 스카폴로 대주교도 포함된다.

그는 소다노 추기경과 마찬가지로 기관(institution)의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한다는 특별한 의무감을 갖고 있다. 이런 교회인은 그런 일을 고상한 대의로 보지만, 신자 대부분은 그런 일의 희생 제물이 되는 이에게는 불의한 일로 본다.

전에 제기된 바와 같이, 올해 90살인 소다노 추기경이 바로스 사건에 개입하여, 바로스 주교가 바로스의 멘토인 전직 사제 페르난도 카라디마가 여러 소년에게 저지른 성학대 사건을 눈감아 줬다는(또는 더 나쁠 수도 있다) 여러 고발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조언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편집자 주- 이 사람은 최근 교구내 사제 성추문을 덮으려고 했다는 혐의가 문제가 되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칠레 방문에서 바로스 주교는 죄가 없다고 했다가 비판이 일자, 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해 교황특사를 칠레로 파견한 상태다.)

이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소다노 추기경은 “교회의 이익”, 즉 기관을 보호해 온 오랜 역사가 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의 한스 헤르만 그로어 추기경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짓부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아 왔다. 교황청은 결국은 그로어 추기경이 여러 명의 젊은 베네딕도수도회 수련자를 성폭행한 죄를 물어 사임시킬 수밖에 없었다.(1995) 그리고 소다노가 그리스도의 군단의 창립자로서 정신병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썩은 마르시알 마시엘을 보호하려 엄청 힘을 썼던 것은 전설적이다. 그가 오직 “교회의 선익을 위한” 생각으로, 동료 교회인들이 저지른 범죄들에 관한 수사를 막으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것이 얼마나 많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만약 그를 비롯한 여러 사람(전 산티아고 대주교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뒤 교황청 개혁안을 논의하기 위해 만든 9인 추기경위원회 위원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에라수리스 추기경이 가장 유력해 보이는데)은 처음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로스 주교의 은폐 의혹을 추궁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은 오산이었다.

교황이 이번에 바로스 주교 건을 재조사하기 위해 칠레로 보낸 찰스 시클루나 대주교는 곧 자신의 임무를 마친다. 그가 파견된 사실 자체가 누군가 결국은 교황에게 그가 어떤 작은 무리의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받았으며, 그것은 바로스 주교가 사임해야 한다고 믿는 칠레의 많은 주교들의 의견과 반대라고 설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바로스는 결국 내려오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이 드라마에서 다른 참여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기 어렵다. 스카폴로 대주교는, 교황대사로 거의 7년을 지냈으니, 로마로 소환되어서 국무원 안의 한 조용한 자리를 받을 것 같다. 그는 올 여름에 65살이 되는데, 조기 은퇴를 허용 받을 수도 있다.

에라수리스 추기경에게는? 이 연극 속의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그는 이미 –작든 크든 간에- 자기가 산티아고 대주교로서 카라디마에게 피해를 본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 바 있다. 그는 지금도 이 피해자 일부가 낸 민사소송에 걸려 있는 바, 그도 바로스 주교에 대한 이들의 고발을 믿으려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 더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그가 바로스 주교에 대한 고발은 증거가 없고 모함이라고 교황에게 말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에라수리스 추기경은 이미 84살이다. 오는 4월이면 9인 추기경위원회의 첫 임기 5년이 끝난다. 때마침 그의 나이가 많은 만큼,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교체하는 이유를 쉽게 댈 수 있을 것이다.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에 관해서는, 그는 90살 나이임에도 여전히 아주 튼튼하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뒤 진행해 온 “태도 조정 프로그램”이 교황청 외교관들 중에 계속해서 전향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현 국무원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의 지지와 증거를 통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돈 안젤로께서는 존재감이 가면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지난해 12월에 바오로 경당에서 소다노 추기경의 90살 생일을 맞아 봉헌된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 보였다. 하지만 몇 분 뒤, 다음과 같은 헌사를 소다노 추기경에게 바쳤다.

“우리는 소다노 추기경 안에서, 다양한 상황에서, 때로는 기쁨에 넘쳐 때로는 눈물에 차,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왔던 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가 지금의 우리에게 해 준 아마도 가장 위대한 증거는 교회적으로 훈련된(ecclesialmente disciplinato) 한 사람의 증거이며, 이는 은총으로서, 우리는 이에 대해 당신에게 감사해야만 합니다.”

아마 프란치스코 교황은 소다노 추기경이 추기경단 단장에서 물러날 때 이 이상한 말들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알려 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시간문제다.

기사 원문: https://international.la-croix.com/news/twilight-time-for-the-vatican-s-godfather/701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