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지난해를 마감하는 칼럼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로 한 해를 정리할 수 있었음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함을 표했다. 관성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종교개혁을 염원하는 이들이 힘을 합쳐 연말에 개혁선언문을 선포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잉크가 채 마를 사이도 없다고 했던가. 한 달도 안 되어 이를 여지없이 깨 버리는 일이 생기고 말았으니 새해부터 낭패감이 크다. 지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구 희망원 사태’와 관련해 실형을 선고받은 한 사제가 1월 16일 교구인사에서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2008-11년 희망원 총원장이던 그는 ‘(법적 근거가 없는) 내부규칙을 어긴 생활인을 직원들이 심리안정실에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중단시키지 않아 92명을 감금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0월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이번 인사는 교회가 희망원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기에 교회 안팎으로 파장을 불러오기에 충분할 만큼 심대하다고 여겨진다.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및 비리척결 대책위원회’(대책위로 줄임)는 1월 18일 ‘희망원 인권유린, 비리 주범을 복권시킨 천주교대구대교구의 1월 16일 사제인사를 규탄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하 <가톨릭프레스> 2018.01.18. ‘[전문] 천주교대구대교구의 사제인사를 규탄한다!’ 참조) 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희망원 사태에 책임있는 사제를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낸 교회를 비판했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마치 그가 종교를 위해 순교한 듯 떳떳해 하는 기현상에 의문을 표하며, 교회의 도덕적 기준이나 법적 기준은 왜 사회의 기준과 다르고 그것에 못 미치는 처분을 내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제정일치 사회도 아니고 더욱이 피해자들이 교회 위탁운영이라고는 하지만 ‘세속’의 사회복지기관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교회가 왜 또 어떻게 범법자를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은 채 곧바로 복권시켰는가에 대해 시민단체의 이 같은 의문과 질책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대책위는 ‘내부의 통렬한 반성과 자성이 없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하면서 “반성이 없는 교회, 비상식적인 교회, 지역민들의 기대와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종교는 스스로 혼란에 빠져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시민사회가 교회의 인사와 관련해 성명을 발표했다는 거의 전무후무한 사실과 1980년대에나 잘 어울릴 법한 ‘규탄한다’는 표현이 독재정권이나 정부가 아니라 교회를 향하고 있음이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어느새 공공연한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잘못을 저지르고도 통렬한 반성이 없는 교회가 과연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근본 물음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교회는 그가 석방되었다고 해서 죄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집행유예’라는 말 그대로 일정한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법리를 더 깊이 숙고했어야 했다.

대구광역시립 희망원 (사진 출처 = 대구MBC뉴스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사실 대책위가 제기한 ‘왜 교회는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나 책임에 반하는 처분을 내리는가’라는 의문은 상식이 있는 신자라면 얼핏 수긍이 가지 않는 처사로 볼 법하다. 어쩌면 이 질문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사랑의 기쁨'에서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성직자중심주의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 12월 15일, 호주 왕립 아동성학대 조사위원회는 조사보고서를 내고 교회 안에서 일어난 아동성학대 범죄를 처리하는 교회의 태도 안에 이 ‘성직자중심주의’가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했다. 비록 사안은 다르지만, 이 보고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사건에 교회가 왜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대처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호주 성학대조사위, ‘의무독신제와 고해비밀 바꾸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7.12.19.)

보고서에 따르면, 성직자중심주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래야 마땅하다는 의식, 우월감, 예외 의식, 권력 남용 등과 연계돼 있으며, 또한 교회가 세상과는 다르다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았고 급기야 아동 성학대도 교회 안에서 비밀로 처리할 문제로 치부하게 된다. 이어 보고서는 신학적 왜곡을 지적한다. “사제는 서품될 때 ‘존재론적 변화’를 겪는다는, 즉 그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며 (한번 사제가 되면) 영원히 사제라는 신학 관념은 성직자중심주의 문화의 위험한 구성요소다. 사제는 성스러운 인물이라는 관념은 통제되지 않은 권력과 신뢰를 과장된 수준까지 이르게 만들었으며, 아동 성학대 범인들은 이를 악용할 수 있었다.”

성직주의를 부추기는 신학은 사제와 평신도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차별을 정당화하며 집행유예인 사제를 사목자로 복권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일은 이번 인사에 앞서 지난해 12월 한 본당 대림 특강에서 바로 이 사제가 신자들에게 반성과 용서, 화해, 사랑 같은 말을 설교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는 기관에서 많은 노숙자와 장애인들이 학대를 당했는데도, 이를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신자들에게 떳떳하게 강의를 할 수 있는 용기와 자격은 누가 준 것인가?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범법자를 사목자로 파견해도, 교회의 결정이니 무조건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는 평신도를 능멸하는 것을 넘어 신성을 모독한 행위다. 우리가 잘 알 듯이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다. 인간 안에 신성이 가장 온전히 그리고 남김 없이 드러난 예수의 성전에서 평신도를 능멸함으로써 그 관계를 파괴했다. ‘평신도 희년’을 선포한 마당에 평신도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그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예수시대에도 이런 신성모독은 매우 드문 것이지 않았을까. 진실로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정녕 하늘이 무섭지 않는가.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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