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윷판을 놀아 본 사람들은 ‘빽도’에 걸려 다 이긴 게임을 놓쳐 버리는 낭패감을 맛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김정은과 문재인 남북 두 정상이 만나 보여 준 파격, 전쟁종식과 평화협정에 대한 희망이 북미대화, 4자대화로 이어져 연내에 평화협정으로 열매 맺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반도 아니 동아시아 평화의 명운이 달린, 하늘이 준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생각하면 절로 ‘성령을 믿으며 주님의 부활을 믿나이다’는 기도가 더욱 절실해진다.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염원에 응답하여 성령의 바람이 한반도를 부활하게 할 것으로 믿는다. 혹 여기에 미국이나 중국 또는 일본과의 정치적 관계가 걸림돌이 되어 ‘빽도’로 물러서기에는, 이 땅 한반도 민중이 70여 년간 흘려온 피맺힌 한이 너무도 참혹하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천명했다." "긴 세월 동안 분단의 아픔과 서러움 속에서도 끝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서 설 수 있었다.” 그렇다. 이제는 분단체제 아래서 한마디 말, 아니 숨소리까지도 ‘빨갱이 매카시즘’에 강탈당해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 온 모든 반동의 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전진만 있어야 한다. 통일운동의 금자탑 개성공단을 다시 복원하는 것에서 시작해 ‘남북 단일경제권’을 큰 그림으로 하는 수십 개의 ‘개성공단’을 만들어 경제적으로도 상호공존과 협력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평화의 날개를 달 때인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두 정상이 만나기 일주일 전 바티칸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조용히, 그러나 놀라움으로 세계를 강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21일 세 여성을 교황청 꾸리아 가운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교리성’ 자문위원에 임명했다. 교황청의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이를 “역사적 결정”이라고 불렀다. 과장이 아니다. 교황청의 9개 성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신앙교리성은 1542년 이단과 교파분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당시 바오로 3세 교황이 설치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신앙교리성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때 더욱 강력해져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 아시아 신학자, 여성 신학자들을 ‘심판’하는 구실을 톡톡히 해 왔다. 그런 신앙교리성이 이제 여성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500년의 남성 성직자 주도의 역사에서 일대 혁명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여성 전문가’라고 했다. 이번에 선임된 이들 가운데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7년에 ‘평신도 가정 생명부서’ 차관보로 임명한 린다 기소니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독일 튀빙겐에서 철학과 신학 학위를 받았고 그보다 1년 앞서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시 이탈리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철학 학위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미켈리나 테나체 교수는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교의신학과 인류학, 동방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과목을 가르친다. 또 다른 한 명인 레티시아 칼맹은 벨기에 출신으로 간호학을 전공했으며 로마의 교황청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4월 21일 교황청 신앙교리성 자문위원에 린다 기소니(왼쪽부터), 미켈리나 테나체, 레티시아 칼맹이 선임되었다. (이미지 출처 = Edizioni Universitarie Romane, CENTRO ALETTI - EDIZIONI LIPA, Groupe de pri&#232;re Abba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비록 작은 변화라 하더라도 교황청의 최고 의결기관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점과 이 길로 계속 간다면 ‘제도화’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 퇴임 후에 ‘빽도’의 가능성이 예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사제 인사이동 때 자주 목격되는 전임자가 했던 일을 뒤바꾸어 놓는 것 같은 현상을 예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미 인구수에서 유럽의 가톨릭은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가톨릭에 주도적 자리를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의 줄기찬 개혁 의지에 다시 한번 찬사와 존경을 표하고자 한다. 이번 여성 자문위원 임명은 처음 여성사제 문제에 대해 ‘내가 누구라고 그것을 판단하는가?’라는 소극적이나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전향적인 입장에서 점차 후퇴해 온 것이 교황 자신의 입장보다는 바티칸 내부의 역관계, 곧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그가 2013년부터 추진해 온 평신도, 특히 여성의 교황청 고위직 등용은 성직주의와 나태한 관료주의에 대한 매서운 비판과 함께 했다. 그는 2014년 교황청 관리들에게 한 연설에서 위선적이고 자리만 탐내는 출세주의자들이 있다면서 이들은 “영적 치매”에 걸려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교황은 더 많은 평신도들, 특히 이들의 전문성으로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곳에는 성직자보다도 이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회에서 여성과 평신도의 역할을 확장시키고 다원적 문화를 고려해 교황청 여러 기구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도록 임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는 세계 어느 교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헌신적인 신앙인이자 실천가다. 다만 이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열정과 신앙을 불태울 자리가 없다. 아니 자리를 주지 않는다. 석박사 학위가 있는 전문가는 물론이려니와 크고 작은 신학원 출신의 많은 평신도를 적재적소에 등용해 이들의 역할을 확장시킨다면 한국교회의 문화는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의 누룩,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재정사정이 어려운 시골 본당은 빼더라도 신학적 소양이나 전문 교육을 받은 이들을 회계 일만 하는 ‘경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무장’(secretary general)으로 뽑아 그에 걸맞는 임금을 주고 활동하게 해 보라. 본당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 온몸을 불살라 투신하리라고 확신한다. 누누이 말했지만 당장 실천할 수 있다. 문제는 성직자들이 이런 데에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성직자들은 교황이 질타한 ‘영적 치매’라는 호통을 자신들에게 내리친 죽비라고 받아들이고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언제쯤이면 평신도의 말을 귀담아 듣는 날이 올지 미세먼지 잔뜩 낀 요즘 날씨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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