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고자 하는 분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 중에 한 예를 들자면, 아마도 구약성경에서 보게 되는 잔인한 “폭력”일 것입니다. 독자분들도 돌이켜 보시면, 교리를 익히는 과정에서 느꼈던 난점들을 나열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입문 후 시간이 제법 흘렀어도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꾸준히 묻고 답을 내려 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질문은 신앙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학생이 제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받은 지 오래된 분들 중에서도 여전히 당혹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이 너무 타락한 것을 보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과 짐승들 한 쌍씩을 남기고는 모두 물에 담가 버린 사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넌 히브리인들을 추격해 온 이집트 병사들을 물 속에 처넣으신 것, 사울이 아말렉과 싸울 때 내린 명령도 있습니다. “너는 이제 가서 사정없이 아말렉을 치고, 그들에게 딸린 것을 완전히 없애 버리라”고 내리신 지시는 섬뜩합니다.(1사무 15,3)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이와 같은 대목을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하느님께서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를 되묻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우려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영원한 사제요 스승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런 폭력을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위배됩니다.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두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극단적으로 비폭력을 설파하신 그분의 뜻에 기초하여 헤아려 본다면 구약성경은 히브리 민족의 정신을 살리는 일, 즉 오로지 그들만의 하느님(야웨)을 삶의 중심에 두고자 했던 투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넌 히브리인들을 추격해 온 이집트 병사들이 물 속에 빠져 죽다. 프레더릭 아서 브리지먼. (1900)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연대기적으로 볼 때, 구약은 창세기가 사건의 시작이 아니라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핍박받고 살았던 하층민(대부분 노동계층)을 이끌고 자유를 향해 출발했던 엄청난 사건을 그 시작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 떠돌이들이 마음을 둘 수 있었던 대상이 바로 그들의 위대한 하느님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하느님은 여럿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로 뭉쳐야했고, 이런 일치를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세상의 그 어떤 우상과도 맞서도록 했던 존재가 바로 히브리인들의 야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에 그 처절한 싸움이 그렇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셨던 야웨라는 신과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여러 부족 신들과의 싸움 구도로 관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경의 폭력과 관련된 사연들은 사실상 인간이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기독립성과 자유를 찾아가는 처절한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에 와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당신 생명을 바쳐 가면서까지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싸움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과 가난을 통해 찾았습니다. 한 인간이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곧 자유로운 하느님과 일치하면 할수록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자 자기 소유의 것을 챙기지 않은 분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각을 통해서 구약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유대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오로지 구약만이 의미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자비의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자 싸워 나가는 이들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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