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2월 10일(대림 제2주일), 마르 1,1-8

광야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주문하는 게 있다. 되도록 ‘아는 티’를 내는 학문적 인용이나 사례를 들먹이지 말 것이며, 제 지식의 차별화를 위해 전문적인, 그래서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표현들에 목매달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이유는 간단한다. 예수는 일상의 소재들로 저 깊고 높은 하늘나라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유대 사회의 일상은 상당히 감정적이었다. 논리정연한 바리사이의 율법도, 정갈하고 정돈된 사두가이의 예배도 민중들 사이엔 그리 달가운 삶의 해법이 아니었다. 먹고 살기 힘들고, 살자고 발버둥 칠수록 삶의 회의와 자괴는 더 무거워진 시절이었다. 한 번 목소리 지르고 보자며 기득권 세력에 덤벼들다 죽어간 갈릴래아의 청년들이 헤아릴 수 없고, 세상 꼴 보기 싫다며 은둔과 수련에 집중하며 삶의 자리를 떠나간 이들도 부지기수였던 게 유대 사회다. 사는 문제는 결국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간절함을 도외시할 수 없기에, 다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건, 감정적인 걸 배제하자는 다소 합리적이고 차분한 것이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자유로워지길 나는 원한다. 또한 내가 누리고픈 자유만큼이나 다각도에서 삶의 본질을 사유하며 정연한 가르침을 베푸는 이의 절제된 자유로움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앙상한 사회학적, 인문학적 지식 더미를 무기 삼아 이야기하지 않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나는 좋다. 철부지들조차 알아들을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마치 광야와 같지 않을까. 이사야의 논조를 이야기하기 전에, 탈출기와 즈카르야서의 메시아적 구절을 되뇌이기 전에, (굳이 보시려면 탈출 23,20; 말라 3,1; 이사 40,3을 보라) 광야는 회개의 자리여야 한다. 누가 되었건, 모여 와서 서로를 향한 연대와 사랑을 표출하는 곳이 광야다. 내 목소리, 내 지식, 내 관점이 맞다는 것에 목매달 필요 없는, 혹은 너만이, 저 영웅만이, 저 목표를 향한 질주만이 옳다는 편협함이 못내 부끄러운, 그곳이 바로 광야다. 

오늘 복음에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세례자 요한이 머문 광야에 모여든다. 하느님의 현존이었던 예루살렘에서 광야로 오는 이들의 발걸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 삶에서 해방되지 않은 이에겐 다소 어려운 발걸음이다. 예수도 세례를 받으러 광야로 옮겨올 터다. 광야는 그래서 창조적이다. 이 창조는 감정적이어야 한다. 한번 만나 보자, 한번 들어 보자, 온 세상이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틀렸다 하더라도, 한번 만나서 들어 보자는 찰나의 감정이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계산해서 될 것이 아니라, 무턱 대고 한번 질러 보는 것이 어쩌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켜켜이 쌓아 온 제 신념의 무덤을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그냥 사랑한다 하면 될 일들을, 꼭 이렇게 해야 사랑한다는 것으로 다듬느라 우리 모두 얼마나 고생하는가. 오늘 하루만큼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내 목소리를 질러 보는것도 좋으리라. 광야인데 어떠하랴….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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