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0월 8일(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

이사 5,1-7에서 하느님은 들포도를 낸 포도밭에 빗대어 이스라엘 백성의 불의와 불신앙을 비판하신다. 마태오 복음은 이사야의 이야기를 조금 수정하여 소개한다. 포도밭이 아니라 포도밭 소작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여전한 불의와 불신을 고발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에게서 돌아서길 수도 없이 반복했고 그때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고발했다. 예언자들의 운명은 박해를 비껴갈 수 없었고,(예레 7,25; 25,4) 그 박해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저지르는 불의와 차별, 그리고 제 신념만이 옳다는 완고함의 결과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대개 하느님에게서 돌아서는 건,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느님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어기는 데서 드러나는 게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제 이익이나 신념에 매몰된 이가 하느님에게서 돌아선 이들이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면서도 모든 소출은 제 것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 그들에게 하느님은 멀리 계셔야 했고, 돌아오지 말아야 했으며, 외아들을 보내기까지 하는 관심은 애당초 필요치 않았다. 

버려진 돌 (이미지 출처 = Pixabay)

예수의 죽음을 봐도 그렇다. 시편 118,22-23에서 인용한 ‘버려진 돌’로 대변되는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그렇게도 갈망하던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체제와 정확히 맞아떨어진 유대 지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양식은 인민들의 고단한 삶과 함께하는 예수에 의해 훼손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예수의 죽음은 체제가 가져온 유대 사회의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 결과였다. 오늘 복음을 놓고 그 저항의 의미를 다시 묻자면, 저항은 밭 주인에게 돌려야 할 당연한 소출인 셈이다. 본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데서 모든 악은 발생한다. 되돌려야 할 소출과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소출에 대한 구별은 모든 정의를 대변한다. 

어느 사회든 기득권이 존재하고 그로 인한 차별과 억압 역시 존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교회는 그 차별과 억압에 죽음으로 저항하는 공동체다. 버려진 돌이 제 힘으로, 제 신념으로 다시 집을 짓고자 제 스스로 집 안에 처박히면 안 된다. 주님이 이루실 수 있도록, 하느님의 정의가 세워질 수 있도록, 그분의 몫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우리 교회는 ‘쓰이는’ 존재여야 한다. 쓰이고자 ‘스스로’ 나서는 데서 교회는 제 정체성을 잃는다.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 그랬다. 우린 그냥 예수처럼 죽음으로 세상에 저항하면 된다. 제 목소리 높이는 곳에 다른 목소리들이 상처받는다. 상처받는 곳에 교회는 하느님의 집을 짓고 소출을 내어야 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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