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1월 5일(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

예수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 갈등을 겪는 건 복음서 전반에 걸쳐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대개 형식주의에 물든, 율법의 본질을 잊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그들을 향한 예수의 질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습관이 있다. 이런 해석은 순진하거나 유치하다. 예수가 하느님나라 운동을 하면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갈등을 겪은 건, 그들 안에 하느님의 정의나 평화, 혹은 자비나 용서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당시 민중들로부터 존경받았다. 몇몇 권력을 지향하고 제 이권에 눈먼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좇아 나름 열심히 살았고 그 뜻의 실천에 게으르지 않았다. 

예수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는 건 다른 차원에서다. 실천을 해도 그 실천이 예수의 눈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라는 데 있다.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가르치더라도 그들의 행실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의 눈에 보이기 위한, 저들만의 업적 쌓기일 뿐이라고 예수는 일갈한다. 흔히 이런 행동을 교만하다, 겸손하지 못하다고 하며 신앙인은 겸손하게 섬길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다. 틀렸다. 이런 논리는 겸손하지 못한 다른 이를 또 다시 생산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겸손하냐, 안 하냐의 논리가 아니라 예수가 바라는 건, 형제가 되라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누구를 위해 내가 겸손해지면 나의 겸손을 받아 누리는 이는 뭐가 되는가? 예수의 일갈을 다시 되짚어 보라.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다고,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을 실천해도 그건 실행하지 않은 거라고 말했다. 겸손하냐, 안 하냐의 논리가 아니라 예수가 바라는 건, 형제가 되라는 것이다. 높고 낮음도, 귀함도 천함도 없는, 형제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점검하는 게 하느님 앞에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 섬기는 이는 낮아짐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형제애로 모두가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목표로한다. 언제까지 부와 가난, 권력과 억압의 이분법적 구도로 복음을 훼손하려 하는가.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인류 역사에 숱하게 반복되는 정반합의 논리로 재단하려 하는가. 

예수가 바라는 하느님나라 운동은 역설적이게도 어떠한 운동도 절대적이라 믿지 않는 겸손함에서 시작된다. 예수는 자신에게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 했다. 제 이데올로기를 신앙의 이름으로 절대화하고 저를 따르지 않을 때 등장하는 미움과 분노, 그리고 질투를 정의감으로 포장하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건,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무 의미없는 저 혼자의 어리광일 뿐이다. 교회 일각에 이런 류의 어리광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형제애를 지향하기에, 철부지의 어리광을 받아 주어야 할 자비의 의무가 있다. 다만, 형제가 잘못하면 타이르듯, 우린 어리광을 피우는 철부지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느님나라 운동을 함부로 들먹이지 마라’, ‘예수를 통해 배우는 온유와 겸손이 무엇인지 물어라’, 그리고 ‘네 옆의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자문하라’ …. 물론 이 말들은 지금 나에게도 매일 반복되어야 할 뼈아픈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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