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2월 4일(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하느님나라'는 서로 회개하여 누구라도 함께 사랑하고 보듬을 수 있는 통 큰 연대의 나라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예수의 치유는 복음 선포의 도구이자 표징으로 이해하곤 한다. 치유에 대한 해석과 그에 따른 의미 부여는 대개 예수의 정체성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치유를 통해 예수는 메시아로 규정되며, 메시아의 시대는 억압받는 민중의 아픔과 불행 안에 위로와 행복을 전해 주러 오셨다고 우린 고백한다. 

예수에게 집중되는 성경 해석에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사람들’로 번역된 이들이다. 3인칭 복수 형태로 묘사된, 특정 계급이나 인물로 국한될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수에게로 수많은 병자들을 옮겨 온다. 그들의 바람은 물론 병자의 치유고 예수는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시몬의 장모도, 온 고을 안에 버려지고 외면받았던 병자들도 치유의 은총을 얻어 누리지 못했을 테다. 

예수는 이 은총을 한 장소, 한 계급, 한 민족 안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 세계에 다른 복음보다 관심이 많다. 메시아의 구원은 계급이나 민족,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른 선별적 특혜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약속된 무상적 선물이다. 메시아를 두고 제 집단이나 계급에 국한된 해석은 보편적 구원을 이데올로기의 체제 아래 가두려는 위험을 내포한다. 탄핵정국 속 등장했던 이른바 ‘대한민국수호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의 편협되고 왜곡된 주장이 그 대표적 예다. 

그리스도인들이 수호해야 할 나라는 ‘하느님나라’이고 그 나라는 특정 사고나 사상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서로 회개하여 누구라도 함께 사랑하고 보듬을 수 있는 통 큰 연대의 나라다. 선악, 흑백이라는 이원론적 구도 속에서 세상을,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갈라짐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게 마르코의 예수가 외친 메시아 사상이다. 유대 사회의 완고함, 제 종교적 우위와 진실됨만을 강조한 그 완고함을 예수는 거듭 질타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이 누군지 우린 모른다. 그들의 사상이나 그들의 종교심에 대해 우린 모른다. 불특정 다수인 그들은 오로지 사회적 약자인 병자와 더러운 영에 물든 다른 이들의 처지에 함께한 이들이다. 그 누구와도 함께할 마음 없이, 그래서 그 누구의 아픔과 부족함과 부조리에 같이 아파할 마음 없이 정의를 외치는 건, 사회 운동가나 개혁가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엔 쉽게 수긍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엇나간 사람이나 상황을 본디 고유한 제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지난한 인내와 자비의 과정이다. 그래서, 내 눈에 원수인 사람, 내 눈에 악한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