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0월 15일(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예수는 지금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한다.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빗대어 말하는 예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가지 않아 멸망할 이들로 비난한다. 예수의 비난은 권력을 가진 자, 힘 깨나 쓰는 자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듣고도 답하지 않는 마음이 무딘 이들에 대한 비난이었다. 

잔칫상은 어떻게든 소비되어야 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잔칫상은 나눠져야 했다. 혼인 잔칫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격은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하는 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대개 오늘 복음을 두고 예수는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 거리에 떠도는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잔치를 선포했다고 해석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요즘 들어 부쩍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편 가름으로 왜곡하며 설레발치는 이들이 교회 안에 늘어난다. 교회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권력이 있든 없든 ‘함께하는 자리’다. 교회가 가난해야 하는 이유는, 가난한 이들 편에 서서 부자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역시 세상의 풍요로움에, 하늘나라의 잔칫상에 함께해야 하는 당위 때문이다. 

혼인 잔칫상을 함꼐 나눌 수 있는 자격은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제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함께하는 데 ‘저 인간’은 아니라고 규정한 채, 제 이데올로기를 들이대는 자들이 ‘마음이 무딘 자들’이고, 그들은 초대받은 곳을 가리는 것으로 제 정의감을 포장한다. 이건 정의가 아니라 ‘게으름’이다. 오늘 복음 5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아멜레오’인데, 관심을 두지 않는, 그래서 대상에 대한 게으름을 가리키는 동사다. 제 신념에 매몰된 이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 특징은 다른 이의 논리나 사유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다. 마태오 복음은 18장에서 ‘어린이’와 ‘작은 자’로 대변되는, 이른바 ‘하찮은 인간, 비천한 인간’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이미 제시했고, 무한한 용서를 통해 형제애적 친교를 강조한 바 있다. 교회는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혼인 잔치를 보증하고 가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교회에 합당한 자는 들을 귀가 있는 자이지 제 옳음을 강변하는 이들이 아니다. 

알다시피 교회는 늘 부족하고 부족한 만큼 쇄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품고 산다. 그렇다고 스스로 심판관이 되어 쇄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나서는 오지랖은 애석한 일이다. 우리 교회의 모든 행동은 심판이 아니라 속죄와 회개여야 한다. 서로 돌아보고 서로 보듬어 주는 것, 그것이 교회의 유일한 일이고 그것이 정의다. ‘함께 아파한다’는 자비를 외치면서 저 혼자 밭에 갈 궁리와 저 혼자 장사할 궁리를 하면서 초대받은 이로 행세하는 것, 가소롭지 않은가. 우린 죄인이든, 창녀든, 절름발이든, 앉은뱅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사랑하면 될 일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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