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14일(연중 제2주일) 요한 1,35-42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의 교회는 시끄러웠으나 희망적이었다. (이미지 출처 = iminju79이 유튜브에 올린 '87년 6월항쟁 1편' 동영상 갈무리)

1960년 2월 28일 대구는 독재에 저항했다. 고등학생들이 선두에 섰고, 대학생과 깨어 있는 시민이 이승만 독재에 저항했다. 2018년 대구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하고자 보수 진영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사상도 변한다지만 대구처럼 극단적 전복의 경우엔 씁쓸함만 남는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의 교회는 시끄러웠으나 희망적이었다. 시대의 아픔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절망 속에 교회는 희망의 기둥이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크고 작은 구시대적 관행과 사회적 무지로 곤혹을 치른다.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그러나 늘 새로운 명제는 역설적이게도 교회 밖 세상을 통해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교회는 육화한 예수의 가시적 표상이다. 교회는 완전한 곳, 거룩한 곳을 지향하되 어둠으로, 가라지로, 또한 죄인과 병자로 존재한다. 예수는 그런 교회에 늘 함께 계신다. 완전하고 거룩한 교회를 위해서도, 완전치 못한 모습을 겸허히, 사랑으로 인지하는 교회를 위해서도 예수는 함께한다. 교회는 이런저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강퍅한 주장들은 실은 신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주입이다. 사회 운동을 하든, 교회 쇄신을 하든, 저마다 신념들은 소중하고 고귀하다. 논쟁을 기피하거나, 옳고 그름의 식별을 게을리하는 건 불의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제 종류대로’ 서로가 ‘알맞은 협력자’로 함께 살아가길 원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드는 어르신과 촛불을 드는 젊은이들의 대립은 어찌되었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고, 그 속에서 우린 오늘도 내일도 각자의 신념으로 소리를 드높이고 대립하고 갈라서고, 찢어지고, 때론 연대할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교회의 쇄신과 성찰의 방향을 요한 복음이 짚어 낸다. ‘와서 보시오.’ 제자가 되고픈 이들에게 예수는 와서 함께 머물길 바란다. ‘함께 머묾’은 ‘다름에의 차가운 적응’이다. 유다 지파의 사자로 이어져 온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힘없는 어린양으로 분하여 나타나는 황망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함께 머무는 것을 통해서다. 독재에 저항한 도시가 독재인지, 해방인지, 희망인지, 적폐인지도 분간 못하는 도시가 되어가는 건, 실은 함께하는 데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제 이데올로기에 맞는 이들끼리 헤쳐 모이는 건, 그만하자. 달라도 너무 다른 이들과의 진지한 논쟁과 대립을 회피하지 말자. 그래서 늘 ‘와서 보시오’라고 말하자. 물론 우리 각자의 신앙과 신념은 비겁하지 않게 인내로이 지켜 내면서 말이다. 그 논쟁과 대립 속에 성령은 어찌되었건 교회와 세상을 바꾸어 나가신다는 믿음은 기본이고.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