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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라서 괜찮은 세상을 향하여[광기와 삶 - 송승연]

정상과 비정상으로 이분화된 구도를 벗어나 존재의 다양성으로

슬픔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귀중한 감정 중 하나이고, 우리는 살면서 슬픔을 피할 수는 없다. 마음이 아플 때 충분히 울어 주는 것이 슬픔의 고귀한 가치며, 그로 인해 다시 기쁨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론 슬픔이 과도해지면 비정상의 규범에 들어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복합적 슬픔장애'(complicated grief disorder)와 ‘지속적인 복합적 사별장애'(complex bereavement disorder)’는 너무 많이 슬퍼하는 사람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식별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제기된,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고민과 다시 한번 직면하게 된다. 바로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기준이다. 정상이란 무엇일까? 비정상이란 무엇일까? 칼로 두부 자르듯 깔끔하게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될 수 있을까? 이렇게 구분된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나이트클럽 방화 사고인 크로마뇬 참사 1주년 미사에 참석해 이렇게 외쳤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직 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일하고 아첨하고 돈 버는 데 골몰하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신경 쓰느라 더는 여기에 없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충분히 울어 주는 현상이 질환과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자연스런 감정 중 하나인 ‘슬픔’이 어느 순간 비정상의 범주로 들어가게 된 것은 효율성을 ‘정상’의 가치로 추구하는 사회의 변동과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장기적이고 괴로운 슬픔을 나누는 시간은 불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슬픔은 긴 호흡으로 천천히 가야만 느낄 수가 있고, 그것은 시간이 흘러 사랑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에서 우리는 잠시 편안하게 호흡을 멈추어 보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주체가 일어설 수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복원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멈춤으로 인한 복원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비정상에 대한 ‘배제’와 정상에 대한 ‘집착’은 차이의 효과가 아니라 동일성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분석한다.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이러한 ‘동일성의 지옥’에서 감정의 거세는 언뜻 효율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이퀄스'(Equals)는 이와 관련하여 타자의 영역이 사라지는 현 시대에 대한 메시지를 제시한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세상은 모든 것이 동일하며, 세계는 매끄럽고, 일말의 부정도 허용치 않는다. 그 완벽의 긍정성을 깨는 것은 죄로 인식된다. 대표적인 것은 감정의 복원, 그 중에서 사랑은 질병으로까지 인식된다. 

영화 '이퀄스'(2015)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영화상 SOS라고 표현되는 그 이름의 질병은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비단, 사랑뿐만 아니라 슬픔, 즐거움, 연민의 감정 등이 다 포함된다. '이퀄스'의 세계에서 SOS는 전염되지 않는 것이라고, 안심하라고 공표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 병(사랑)의 본질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영화의 주인공 니아와 사일러스는 처음 SOS가 발병되었을 때(감정이 복원되었을 때) 그것을 감추려하고, 동일성의 지옥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보면서 변화되기 시작하고,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은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이퀄스'는 쉽고 명쾌하게 동일성의 지옥을 이야기한다. 할 수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는 상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6월 장애인에 대한 희년 미사 강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현시대에서 ‘불완전함’은 잊어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아픈 이와 장애인을 구석진 시설에 격리, 수용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릇된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그들이 위기의 시대에 수용할 수 없는 경제적 짐이 되니까 가능하면 제거하는 더 좋다’는 말을 들을 때조차 있습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고통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들만이 산다고 세상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연대와 서로 포용하는 존중함이 늘어날 때 더 나은 세상이 됩니다.”

이처럼 정상에 대한 지나친 추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다양한 존재의 받아들임이다. 나와 다른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사랑으로 가는 길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외적 다양성, 신체적 다양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면의 다양성이 있다는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개념이 있다. 이는 특정 존재가 정상과 비정상의 범위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정신장애인, 발달장애인을 포함하여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장애인에 대해 병리학적 관점이 아니라 내면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성별, 인종, 문화, 성적취향에 대해 다양함을 존중하는 것처럼 정신장애인도 동등한 사회적 범주로 분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장애인을 정상이라 인식되는 범주로 이동시키기 위해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신경다양성은 치료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정신장애인 또한 자기표현과 자기 존재의 진정한 형태라고 믿는다. 이러한 신경다양성 개념은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한다. 특정 집단을 비정상으로 구분하여 치워 버리는 행위는 쉽고 단순하지만, 서로에게 고통이 될 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나라서 괜찮은 세상을 향하는 것은 모든 존재를 다양성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이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더 나아가 사회와 인류에게도 위로와 상생의 힘이 될 수 있다.

'광기와 삶'은 잠시 쉬었다가 2018년 3월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송승연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 현장에 있다가, 지금은 한국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비당사자 활동가로 당사자운동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세력으로 확장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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